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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말씀과 함께, 공동체와 더불어

사제의글

2015-09-15 22:10

연중 24주 수(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2,317
김오석 라이문도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가 7,32)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라는 말이 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뜻이다. 어떤 사실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한다는 의미다.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한다는 말이다. 이 말은 원칙 없이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사건과 상황을 해석하는 경우에 쓴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란 사실 힘을 지니고 있는 사람 아니면 어렵다. 힘 있는 사람의 이런 행태는 연약한 이들에게는 폭력으로 둔갑하여 고통을 준다. 오늘날 지배 권력자들의 수없는 말 뒤집기는 우리에게 분노와 고통으로 다가오기 마련이고,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들의 후안무치한 행태를 감추려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자의적 법 해석을 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화석화된 슬픔이 되어 버린 지 이미 오래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단식과 금욕의 삶을 사는 예언자적 면모를 드러낼 때는 마귀 들렸다!”고 비난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이 먹고 마시기를 마다하지 않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라고 비난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향해 던진 예수님의 질책이 오늘 우리가 선택한 복음의 말씀이다. 요한의 세례도 거부하고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도 받아들이지 않는 너희는 원칙 없는 무뢰배에 불과하고 모든 것을 자기 유리할 대로 갖다 붙이는 아전인수의 어리석은 자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당시 유다인 아이들의 놀이 중에 몇몇은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할 때 다른 무리는 곡()을 했다. 곡을 하는 아이들은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아이들과 함께 즐거워하지 않았고,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하는 아이들 또한 곡하는 아이들과 함께 슬퍼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함께 놀아주지 않는다고, 즉 사랑과 관심을 찾아볼 수 없다고 서로를 비난했다.

 

철저한 자기중심적 이기주의를 조롱하고 있다.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할 때는 기쁨을 나누어야 한다. 슬퍼하는 사람 곁에 있을 때는 슬픔을 나누고 위로해야 한다. 기쁨의 순간 기쁨을 누리는 일, 슬플 때 슬픔을 느끼는 이 단순함이 인간의 삶을 충만하게 한다. 그런데 이 단순한 공감과 함께 함이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쉽게 왜곡되고 폄하되는 현실이 가슴 아프다.

 

이현령비현령의 말마디가 드러내는 철저한 자기중심의 이기심과 아전인수의 해석이 아니라, 시대의 아픔과 고통 받는 이들의 처지에 공감하고 동반할 수 있는 연민과 감수성을 갖고 있는지 돌아보는 하루가 되었으면 한다. 매일 얼굴 마주치는 가까운 가족들과 이웃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들의 필요에 응답할 수 있도록 잠시의 여유를 가질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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