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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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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의글

2015-09-21 01:52

연중 25주 월(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2,172
김오석 라이문도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9)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오늘은 마태오 사도의 축일이다. 마태오 복음서의 저자로 알려진 분이다. 마태오는 세관원이었다. 세관원(흔히 세리라 부른다)은 식민지배자인 로마인, 즉 이방인들과 상종하기 마련이었다. 또 부정한 방법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대분분이어서 직업상 죄인이었다. 부유하고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었겠지만 늘 사람들의 경멸 대상이었다.

 

길을 가시던 예수님이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오를 향해 나를 따라라고 부르신다.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문장으로만 볼 때 예수님의 부르심과 마태오의 따름은 그 시차를 느끼기 어렵다. 즉석에서 이루어진 사건으로 표현되고 있다. 정말 그렇게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을까?

 

마태오의 결정적 회심의 사건인 예수님을 따름이 순간에 벌어졌을지라도 그 이전에 이미 마태오는 철저한 자기 인식에 도달해 있었음이 분명하다.

부와 안락함 속에서 겪는 허무와 허탈, 자기 모멸감과 삶의 비참함에 대한 자기 성찰의 시간이 많았다는 의미다. 삶과 자기 존재에 대한 질문이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새로움에 대한 갈망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누가 나를 이 비참함에서 건져줄 수 있을까? 모든 사람들이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침 뱉고 뒷 담화하는 이 모멸스런 처지를 어찌할꼬? 어떻게 해야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느님은 도대체 내가 무엇을 하길 원하실까?” 잠 못 이루고 하얗게 지새운 날들이 수없이 많았으리라.

 

새로운 세상을 누림은 익숙함을 버리는 용기 있는 결단의 결과일 뿐이다. 두렵고 떨리지만 캄캄한 어둠의 밤을 뚫고 여명의 새벽으로 한 걸음 내딛는 호기로운 도전이 필요하다. 도전하지 않으면 성취는 없는 법, 실패는 도전하는 이의 스승일 뿐이다. 현재의 편안함과 안락에 취해 달콤한 꿈만을 부둥켜안고 안주하는 자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다.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할 수 없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다.

 

죄 많은 의인이 죄 없는 죄인을 힐난하고 비웃고 무시하는 세상이다. 힘이 없어서, 가난해서, 배경이 별 볼일 없어서, 그저 숨죽여 소박한 삶을 성실히 살려는 죄 없는 죄인들이 죄 많은 의인들에게 짓밟히고 욕먹는 세상은 불의하다. 그런 세상에 나도 함께 몸 담그고 살면서, 그런 세상에 무심하다는 자각은 섬뜩하다. 죄 없는 죄인 편에 설 수 있는 죄 많은 죄인임을 자각하는 신앙인이 많아져야 한다. 철저한 자기 성찰과, 삶에 대한 질문을 멈추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요청되는 세상이다. 그런 사람만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모든 것을 뒤로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그분을 따를 수 있다. 마태오처럼.

타인을 향한 무관심의 벽을 날마나 두드려 무너뜨리려 하는, 죄 많은 죄인으로 살아가는 자, 일상의 삶 속에서 분명히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예수님은 죄 많은 죄인을 당신 제자로 흔쾌히 부르신다.

나는 누구인가? 죄 많은 의인인가? 죄 없는 죄인인가? 아니면 죄 많은 죄인인가? 혹 죄 없는 의인인가??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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