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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말씀과 함께, 공동체와 더불어

사제의글

2015-09-24 00:53

연중 25주 목요일

2,032
김오석 라이문도

헤로데 영주는 에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가 9,7; 9,9)

 

불행한 사람은 항상 불행을 예감하며 살 가능성이 높다. 불안과 두려움은 미래에 대한 것이지만, 과거로부터 시작된다. 사랑에 실패한 사람은 사랑하기를 두려워한다. 불행했던 사람은 새롭게 찾아온 좋은 기회나 사랑조차 불안과 두려움으로 맞이하고 실패를 예상하며 행동하기 쉽다.

 

헤로데는 의인이었던 요한을 자신의 체면과 자존심을 위해 목 베어 죽게 했다. 그 기억이 헤로데에게 만족감을 주기는커녕 불행으로 몰아넣었다. 의로운 사람을 잔치판의 돼지 머리 취급을 한 그의 처사가 뿌듯한 만족감과 충만함을 안겨주었을 리가 없다.

 

병의 치유와 마귀 추방으로 드러난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들은 꼬리를 물고 퍼져 나가고 사람들은 죽은 요한이 되살아났다.’고 하고,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고,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이 헤로데의 귀에 들어갔다.

 

예수님은 당연히 요한이 아니었지만, 헤로데의 생각은 요한이 되살아났다.’는 소문에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는 충격으로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인다. 죄책감에서 오는 불안 심리다. 불안은 미래에 대한 것이다. 예수가 요한의 환생이라면 그의 복수가 자신에게 칼날을 겨누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당연지사다.

 

과거의 불행이 집요하게도 미래에 반복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서 생기는 두려움은 이렇게 사람의 마음에서 생겨나 미래를 바라보는 시야를 어둡게 한다.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경제적 어려움이나 사랑의 상실, 그리고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거부당하고 왕따 당할 수 있음에 혹은 자신의 민낯이 드러나 감추고 있는 것들이 폭로될까봐,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이 덧없고 쓸모없는 인생이라는 허무의 심연에서 궁극적인 불안과 두려움에 빠진다.

 

사실 인간 존재의 조건 자체가 불안과 두려움이다. 무엇인가를 붙들기 위해 욕심내고, 집착하는 순간 우리는 이 조건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적어도 생명유지를 위한 기본적 물적 조건의 충족을 위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은 늘 불안과 두려움의 서늘함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오히려 생생한 생명의 활력은 적당한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서 피어나는 연꽃 같은 것이라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헤로데의 불안과 두려움이 아니라, 활력 있는 삶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나의 삶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불안의 요소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그것은 신앙 안에서의 초탈이다. 모든 것을 좋게 해주시는 주님의 섭리를 믿음이다. 선한 지향과 선한 노력이 좋은 결과를 내리라는 긍정성이다. 원치 않은 결과조차 감사할 수 있는 내적 힘을 간직하고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태도는 우리로 하여금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산을 넘어갈 수 있게 이끌어 준다.

 

오늘 나의 불안과 두려움은 어떤 것인지 묵상해보자. 헤로데의 죄책감에서 오는 그런 불안과 두려움이라면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음으로써, 살아가면서 만날 수밖에 없는 그런 종류의 불안과 두려움은 주님께 드리는 신뢰와 의탁을 통해 삶에 대한 긍정성과 초탈을 통해 넘어설 수 있는 은총을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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