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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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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의글

2015-10-04 21:02

연중 27주 월요일

1,965
김오석 라이문도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가 10,29)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루가 10,37)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루가 10,37)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어떤 것인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다. 사랑의 이중계명이다. 땅에서 하늘을 향한 수직 작대기가 나와 하느님의 관계를 의미한다면, 땅에서 땅을 잇는, 나와 너를 잇는 수평 작대기가 나와 이웃의 관계를 뜻한다. 이 수직 작대기와 수평작대기를 교차시키면 십자가가 된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조건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선언은 십자가의 삶을 살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십자가야 말로 하느님과 인간을 결정적으로 연결한 구원의 좌표라는 선언과 같다.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 곧 십자가와 하나가 된 삶이 구원인 이유는 그 안에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온전히 녹아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증거는 이웃을 사랑하는 실천으로 드러난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결국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요,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잘 알지 못해도 결국 하느님을 사랑하는 증거를 보여준 것이 된다.(1요한 4,20-21참조)

 

문제는 누가 이웃이냐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명확하다. 당신 자신과 동일시한 형제들 가운데 가장 작은이들”(마태 25,40)이 바로 사랑해야할 이웃이다. 굶주린 이, 목마른 이, 나그네 된 이, 병든 이, 감옥에 갇힌 이가 바로 그들이다.

 

오늘 복음은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이를 약을 발라주고 싸매주고 노새에 태워 여관에 데려가 돌봐준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준 이라고 가르친다. 구체적인 상처와 아픔과 고통에 자신의 손과 발과 재물을 사용하여 돌보아 줌으로써 곤경에 처한 이의 이웃이 되어준 이가 진정한 이웃이라는 것이다.

 

유다인의 사고에서 이웃이란 일가친척, 가까운 파벌, 아무리 넓게 보아도 유다인의 범주를 넘어서지 않는다. 그러나 강도당해 피투성이가 된 사람을 사제도, 레위인도 그냥 지나쳤을 때, 유다인들에게 무시와 적대를 당했던 사마리아 사람이 정성스럽게 돌보아 줌으로써 그의 이웃이 되었다고 오늘 예수님은 가르치고 계신다.

 

예수님은 그 이웃을 원수에게까지 확대하셨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오늘날 억압과 착취당하고 있는 세상의 살아있는 모든 것들, 산과 바다, 땅과 하늘까지 우리 이웃의 범주에 포함해야 한다. 이웃을 찾아 이웃이 되어준 이가 이웃이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은 묻는다.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루가 10,36)

그리고 우리에게 재촉하신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루가 10,3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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