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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말씀과 함께, 공동체와 더불어

사제의글

2015-10-12 22:52

연중 28주 화요일

2,410
김오석 라이문도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예수님을 초대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시어 자리에 앉으셨다.”(루가 11,37)

너희의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루가 11,39)

 

계명과 율법의 철저한 준수로 자신들을 이방인들과 다른 유대인들과 분리되기를 원했던 이들이 바리사이파다. 예수님 당시 바리사이는 유다사회의 유력자로서 역할을 하였다. 오늘 예수님은 어떤 바리사이의 초대에 응해 그 집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식사 전에 손을 씻는 정결례를 생략하신다. 이를 보고 집 주인 바리사이가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고 한 말씀 하신다.

 

사실 대접받는 처지에서 대접하는 주인을 향해 신랄하게 비판을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어려운 일이고 또 예의에도 어긋난다. 그러나 예수님은 상황의 본질을 꿰뚫어 보신다. ‘중요한 것은 겉치레의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다. 손을 씻고 안 씻고의 문제가 핵심이 아니다. 이 음식들은 도대체 어떻게 마련한 것이냐?’고 되묻고 계신다.

 

가난한 이들의 피와 땀이 스민 이 음식들은 너희 바리사이의 탐욕과 사악함이 이뤄낸 죄악의 결과가 아니더냐? 너희가 행한 행실을 우선 성찰하고 반성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지적이다. 겉도 깨끗해야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물도 깨끗해야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다는 비판이다. 그릇이 형식이라면 깨끗한 물은 내용이요, 이럴 때 그 물을 마시는 사람은 갈증을 해소하고 건강한 몸을 유지할 수 있다. 그릇은 깨끗하되 그 안에 들어있는 물이 흙탕물이라면 오히려 사람에겐 독이 되고 만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정결례는 당연히 위생상 의미가 있고 율법에 정해진 것이지만, 보다 중요한 핵심은 준비된 음식이 정의의 열매가 아니라 착취와 탐욕의 결과라면 결코 하느님을 기쁘게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독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부당한 소유물을 쥐고 행세를 하는 사람과의 어울림은 결국 그 본색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바리사이는 예수님을 초대하여 친분을 원하지만 사실 그들의 의도는 탐욕과 사악함의 열매인 부정한 음식으로 예수님을 자기편으로 물들이고자 하는 것이었다. 바로 예수님은 이 부분에서 속이 뒤집히고 말았으며, 손님으로서 대놓고 하기에 곤란한 비판을 서슴없이 행하게 된다. 자존심 상한 바리사이들의 반발과 적의는 당연한 것이었다.(루가 11,45)

 

이런 모습은 교회의 역사를 통해 계속되어 왔고, 특별히 교회의 권력화와 세속화가 심할수록 그 정도는 더하기 마련이었다. 오늘날 우리 교회와 본당의 현실도 비슷하다. 힘 있고 가진 것 있는 본당의 유력자들은 보통 주교님이나 사제들과도 가까운 친분을 유지하기 마련이다. 여유 있고 시간도 있고 거기에 적당한 신심도 함께 한다면 그런 관계는 꽃을 피우기 마련이다.

그러나 사제의 발언이나 질책이 자신들의 이익이나 사고방식, 정치적 지향에 거슬리기 시작하면 곧바로 외면하고 비난한다. 그래도 전에는 대놓고 그러지 못했지만 요즈음은 면전에서 삿대질하는 것도 다반사다.

 

혹 그런 분이 계시다면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 그분의 삶과 죽음을 찬찬히 공부하고 묵상해 보길 권한다. 복음이 오늘 나에게 무엇을 지시하는지, 예수님께서 오늘의 사회 정치적 상황에서 나로 하여금 어떤 선택을 하도록 요청하고 계시는지,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깊이 묵상한 연후에 그리해도 늦지 않다. 정의와 평화 그리고 사랑의 하느님나라는 우리의 삶속에 씨앗으로 현존하는 실재이고, 그 완성을 위해 분투노력하는 것은 우리 신앙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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