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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말씀과 함께, 공동체와 더불어

사제의글

2015-10-13 23:22

연중 28주 수요일

1,992
김오석 라이문도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루가 11,42)

 

바리사이들은 철저히 율법과 계명을 준수함으로써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다. 자기 재물의 십분의 일은 무조건 하느님의 몫으로 봉헌하였다.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는 소유욕도 하느님을 예배하기 위해 규정한 율법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다. 발칙한 생각이 떠오른다. “소유욕에 사로잡혀 하느님 몫도 제 것인 양 내놓지 않는 소위 믿음을 가진 이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는 십일조도 내지 않으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도 아랑곳 하지 않는구나.”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은 십계명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꼭 지켜야만 할 하느님과 인간관계의 윤리로 받아들이고, 이를 어기면 칼에 찔린 듯 아파하고 뉘우치며 구원에 이르지 못할 것처럼 노심초사하는가? ‘라는 대답이 쉽게 나오는가? 주어진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리스도인으로서 최소한의 윤리생활에도 철저하지 못한 우리의 나약함을 반성해야 하겠다.

 

나아가 바리사이들처럼 기본적인 계명을 철저히 준수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신앙생활은 아직 초보적 미숙아의 신앙임을 오늘 예수님의 지적으로 알아들었으면 좋겠다. 모든 계명과 율법은 당연히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요약된다. 오늘 예수님은 이웃 사랑을 의로움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말씀하신다. 의로움이 이웃 사랑과 같은 말인지 묵상해 볼 필요가 있다.

 

이웃은 가깝게는 가족, 친지, 그리고 같은 지역에 사는 이웃사촌을 칭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 이웃이 여럿 모이고 확장되면 그것은 사회가 된다. 모든 사회 구성원 공동의 이익과 행복을 공동선이라고 한다. 공동선을 이루기 위한 모든 활동은 당연히 정의공정함과 불편부당함이 그 주춧돌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웃을 사랑한다 함은 정의의 실현과 다르지 않다. 사회정의를 추구하는 모든 활동은 그러므로 신앙인들의 기본적 태도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이웃을 사랑하는 구체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구약의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 즉 공동체의 구원을 바라셨다. 야훼 하느님은 모세에게 명령한다. ‘나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그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내니,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해내어라.’(탈출 3,7-10 참조)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나라의 내용을 가르치시고, 그 나라를 이루기 위해 애쓰다가 돌아가셨다. 하느님 나라는 개인의 나라인가? 모든 백성의 나라, 공동체의 나라다. 나와 너의 나라다. ‘의로움하느님 사랑과 같은 수준에서 언급된 오늘 복음의 의미를 새길 수 있어야 하겠다.

 

이웃 사랑은 의로움, 정의의 실현이고, 정의는 하느님 나라의 초석이 되는 정신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은 이 사회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그런 사회가 되도록 목숨까지 걸고 애써야 할 당연한 의무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단순히 계명을 잘 지켜 지옥가지 않을 윤리생활에 매달리는 것을 넘어,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오늘 내가 무엇을 하고,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신앙의 본질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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