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엽동성당

말씀과 함께, 공동체와 더불어

사제의글

2015-10-16 23:06

연중 28주 토요일

2,001
김오석 라이문도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루가 12,8)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마태 26,74; 마르 14,71; 루가 22,57)

베드로는 거짓이면 천벌이라도 받겠다며 무려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증언했다. 누군가를 안다고 말하는 것은 때로는 죽음을 각오하는 선택이다. 베드로는 육신을 죽일 수 있는 권력 앞에서 자신을 부인한다. 알면서 모른다고 하는 것은 오늘 현재를 있게 한 뿌리로서의 지나간 과거의 시간을 부인하는 것이기에 자신의 현존재를 지워버리는 행위다. 알면서 모른다고 말하는 순간 그는 이미 영적인 차원에서는 소멸되어 버렸다. 스스로 자신을 지옥에 던져버렸다.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 앞에서 육()을 살리려 영()을 죽인 것이다.

 

사람을 안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어디 출신인지, 무엇하는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으로 누군가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은 신비이다. 인간은 그 안에 하느님의 영을 품고 있다.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그 사람의 신원에 관련되는 여러 정보와 생각을 아는 것에 더하여 그 사람 안에 신비로 머무시는 분, 그 사람을 세상에 보내신 분을 알지 못하면 그 사람을 참으로 안다고 할 수 없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28-29)

 

예수님을 안다고 사람들 앞에서 증언하는 것,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분을 안다고 증언하는 것은 생각보다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닌 듯하다. 단순한 예로, 많은 교우들이 사람들이 많이 모인 식당이나 지하철 안 그리고 공공장소에서 십자 성호경 한번 긋는 것조차 무척이나 쑥스러워 하고 불편해 한다. 가톨릭의 세례를 받아들인 나의 선택이 부끄럽고 쑥스러운 선택인가? 아니면 자랑스럽고 용기 있는 새로운 인생관과 세계관으로의 진입인가? 예수님을 주님이요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그분을 통해 드러난 사랑과 정의와 평화의 하느님 나라를 위해 지금 여기 나의 삶의 자리에서 소박한 자기 싸움을 하는 인생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될 일이다. 오히려 지붕 위에 올라가 온 세상에 선포할 일이다.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서야 되겠는가? 산위의 마을은 드러나 보이게 되어 있다.

 

예수님을 알면서 모른다고 말하는 어리석음을 떨쳐버려야 한다. 모른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세상의 것에 대한 집착과 욕심을 찬찬히 바라볼 수 있다면 좋겠다. 침묵 중에 뚫어져라 바라보면 허망한 실체가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죽음 앞에 놓인 내 삶의 의미를 묵상하는 것이 많은 깨달음을 줄 것이다.

 

나는 바라는 게 없다. 나는 두려운 게 없다. 고로 나는 자유롭다.”

작가 니코스 카찬차키스의 묘비에 쓰인 친필 좌우명이라 한다.

주제넘지만 단 하나 바라는 것은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그분을 만나는 것이다.’라는 말을 추가해 주고 싶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며

죽어도 주님을 위해서 죽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거나 죽거나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