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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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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의글

2015-10-20 01:37

연중 29주 화요일

2,207
김오석 라이문도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루가 12,35)

 

군대에는 5분 대기조라는 비상 출동을 대비하는 부대가 있다. 군화를 신은 채로, 탄띠를 매고, 철모를 쓰고 소총을 움켜쥔 채, 얼굴은 새까맣게 위장 크림으로 칠하고 내무반에 대기하고 있는 군인들을 상상해보라. 일촉즉발의 긴장감과 긴박감을 느낄 수 있다. 상황이 발생하면 단독군장으로 탄약을 챙겨 위병소를 통과하는데 5분을 초과해서는 안 된다 해서 5분 대기조라 한다.

 

오늘 복음은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태도가 그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돌아온 주인이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주려고 눈을 부릅뜨고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구원 사건이나 한 인간의 종말 사건인 죽음은 그렇게 불쑥 고개를 쳐들고 다가오는 실재다. 죽음이 한 인간의 이승에서의 삶을 완결 짓는 사건이라면 그것은 하느님 구원의 때와 필연적으로 연관을 맺게 된다.

 

구원의 때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죄다. 죄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느님과 영적 분리를 강요하는 영적 죽음이고, 그 결과 육신의 죽음은 회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된다. 이렇게 인간을 죽음으로 내모는 죄의 유혹은, 대비하지 않고 방심하고 있는 영혼에게 살며시 다가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끌어당기는 늪과 같다. 그 교묘함을 감지했을 때는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처지일 때가 많다. 오히려 대부분 그 상황을 탐닉하면서 일말의 가책조차 무의미로 돌리는 습관적 일상성에 빠져 드는 경우가 많다. 다시 하느님을 향한 돌아섬, 회개가 어려운 이유다.

 

오늘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20)고 가르친다. 이 말에 감동을 받은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복된 죄”(felixculpa)라고 했다. 부활 성야에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부활초에 불을 밝히고 장엄하게 선포하는 부활찬송(Exsultet)은 이렇게 노래한다. “참으로 필요했네, 아담이 지은 죄, 그리스도의 죽음이 씻은 죄. , 복된 탓(felixculpa)이여! 너로써 위대한 구세주를 얻게 되었도다.”

 

복된 죄라 함은 죄지은 것이 복되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거저 주시는 은총으로 구원되는 우리들의 본성적 죄스러움에 대한 자각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아담의 죄로부터 이어지는 죄의 연대성에 대한 뼈아픈 통찰이 필요함을 말해준다. 죄의 지배로 죽음이 야기된 것보다 예수님의 죽음이 가져온 하느님의 은총으로 온 인류가 죄의 지배를 물리쳐 이긴 것이 훨씬 소중하다는 가르침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회개하는 죄인의 눈물방울이라는 말이 있다. 죄에 걸려 넘어진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인간이란 죄 많은 역사와 죄 많은 사회 안에 태어난다. 인간은 완전함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적 존재이지 아직 완전하지 않다. 결점과 흠, 부족함을 지닌 채 죄를 짓고 사는 나약한 존재다. 하느님은 우리의 나약함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신다. 하느님은 그러기에 당신의 은총을 무한대로 우리를 향해 쏟아 붓고 계신다.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 흘리는 죄 많은 우리를 하염없이 기다리시며.

 

그러므로 우리의 태도는 언제나 이러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다시 당신을 향해 고개를 돌립니다.” 내 안의 어둠을 붙들고 자학하여 포기함으로써 그 어둠에 자신을 묻지 않고, 세례로 내 안에서 타올랐던 그리스도의 빛을 더욱 밝게 하기 위해 내 마음의 등불에 기름을 더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시작하는 사랑과 나눔 그리고 선행의 기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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