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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말씀과 함께, 공동체와 더불어

사제의글

2015-10-21 23:58

연중 29주 목요일

1,985
김오석 라이문도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가 12,49)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가 12,51)

 

예수님께서 타오르기를 바라는 불은 세상의 죄와 거짓을 모두 태워버리는 심판의 불이다. 그 불은 하느님 나라이며 성령의 불이다. 하느님 나라를 위한 심판의 불이 타오를 때 억압과 강제, 불의와 거짓으로 이룬 가짜 평화는 전복되고 분열한다. 하느님 나라를 위한 성령의 불을 간직하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길은 육친의 정, 혈연의 관계를 뛰어넘어야 한다. 부모나 형제를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나라를 위한 투신을 모든 세상의 가치 위에 두어야 한다는 준엄한 말씀이다.

 

이 불이 활활 타오르게 하려는 선택 앞에서 예수님의 고뇌는 참으로 인간적이다. 인간적인 그분의 고뇌는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당신의 선택으로 겪게 될 고난과 죽음을 당신이 받아야만 할 세례로 표현한 예수님은, 그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참아내야 할 고통과 두려움 앞에서 번민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예수님을 뒤따르고자 하는 제자의 길에서 겪어야 할 고뇌를 우리 역시 비켜갈 수 없다.

 

나는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가 12,51) 야훼 신앙에 대한 화석화된 관념과 종교적 타성, 율법중심의 지배체제와 가난하고 작은이들에 대한 억압과 강제, 구조적 불의와 부정을 뒤집겠다는 예수님의 선언이다.

분열은 창조의 시작이다. 하느님께서 혼돈 가운데 빛과 어둠을 가르시어 시간을 창조하셨고, 물과 물 사이를 갈라 공간을 창조하셨다.(창세 1,1-8 참조) 생명의 탄생과 성장은 세포의 분열이며, 세포 분열이 멈추는 순간이 죽음이다.

 

분열은 새로운 하나 됨을 위한 필연적 수순이다. 적당한 타협과 강제의 결과인 가짜 평화는 그 정체를 드러내 갈라져야 하고, 고난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일치를 이루어낸다. 썩은 바다는 강한 태풍과 파도로 그 밑바닥까지 뒤집어질 때 새로운 생명력을 회복하는 법이다. 오염물과 찌꺼기로 뒤덮인 강바닥도 거대한 홍수로 쓸려 내려가야 정화된다.

 

바야흐로 우리나라는 역사교과서 문제로 평지풍파가 일고 있다. 합리성과 타당성, 그리고 절차적 합의의 과정과 상관없이 백성들이 요동을 치며 갈라서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진원지가 권력의 핵심인 정부요 대통령이다. 대한민국의 역사가 아니라 아버지의 역사를 위한 헌신과 투쟁이 눈물겹다. 이 분열의 결과가 어떤 열매를 맺을지도 눈 부릅뜨고 지켜봐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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