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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말씀과 함께, 공동체와 더불어

사제의글

2015-11-04 23:55

연중 31주 목요일

2,756
김오석 라이문도

그때에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몰려들고 있었다.”(루가 15,1)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루가 15,4)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루가 15, 8)

 

하느님의 손길로 창조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자기 이름과 자리를 지니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조화이고 질서이며, 빛나는 생명력의 원천입니다.

자기 이름을 상실하고 있어야 할 자리를 벗어난 존재와 사물의 원상복귀는 창조 본성의 회복이 됩니다. 달리 말해 하느님의 본래 의도를 되찾는 일이 됩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양 백 마리 중 길 잃은 한 마리를 찾아 나선 목자의 마음과, 은전 열 닢 중 사라진 한 닢을 찾는 부인의 마음이 하느님의 마음이 되는 이유입니다.

 

이탈된 존재는 기필코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죄는 인간이 자신의 본성과 있어야 할 자리를 상실하는 원인입니다. 본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은 이탈의 현실에 대한 깨우침에 좌우됩니다. 회개는 그러므로 자기성찰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몰려듭니다.(15,1) 이유인즉 자신들이 멀리 떨어져 나와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기 스스로 어찌해볼 방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의롭다 자처하는 뭇사람들의 손가락질 받으며 서러운 눈물 밥을 꾸역꾸역 입 안에 넣으며 죽지 못해 살아가던 인생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이 필요함을 마음 깊숙한 곳에서 절절이 깨닫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의 경건함과 의로움, 해박한 율법지식과 철저한 율법 준수를 통해 스스로 의롭다고 자처하기에 회개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의 경건함과 의로움이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쓸모없는 것으로 밖으로 내던져 버렸습니다.

 

하늘은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확신하는 의인을 두고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늘은 회개하는 죄인의 눈물을 가장 아름답다하고 늘 기뻐합니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15,10)

 

하느님은 길을 벗어나,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은 단 한 마리 양에게 무한한 애정을 드러내는 분입니다. 아흔 아홉 마리의 전체 양 떼가 도적이나 들짐승의 습격에 무방비로 당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는 분입니다.

혹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두고서, 자신들이 그놈을 지키는 양들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멍청하고 잘 걷지도 못하고 눈도 어두운 그런 양은 차라리 없었으면 좋겠다고, 왜냐하면 부담스럽기 때문이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을, 하느님께서 떠나가고 계신 장면일 수도 있다는 발칙한 생각입니다.

 

자본주의 자유 시장 경제의 가혹한 경쟁 체제로부터 배척되고 탈락한 노동자들, 생때같은 자녀들과 가족들을 대낮에 눈뜨고 바닷물에 수장시킨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 그리고 이 땅의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 그들이 소수라고 외면하면 하느님은 그들에게로 가고 결국 하느님 없는 이 사회 전체는 위험에 처하게 되리라는 시대의 징표로서의 예수님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소외된 이들을 챙기고 관심주지 않는 사회는 진정한 평화와 축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슬픔에 눈물 흘리고 고통스러워하고, 가로막힌 소통의 부재로 애간장이 타들어 가는 사람들을 곁에 두고 웃는 웃음이 편안할 수 없는 것이 인간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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