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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말씀과 함께, 공동체와 더불어

사제의글

2015-11-07 00:14

연중 31주 토요일

2,213
김오석 라이문도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가 16,13)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들고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비웃었다”(16,15)고 오늘 루가 복음은 전합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비웃고 있다는 뜻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돈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돈은 오늘날 자본주의 시대의 최고 권력이요, ()으로 군림합니다.

 

하느님과 돈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선언은 모질게 느껴집니다. 특히 돈이 많은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듣기 싫은 말씀일 것입니다. 음양의 원리가 그렇듯 두루 뭉실 하느님과 돈이 어우러져 가면 될 것을 뭘 그리 칼로 무 토막 내듯 생각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침 이슬도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되고, 독사가 먹으면 독이 되듯이 돈도 어떻게 쓰이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무조건 하느님과 반대되는 것이라 말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항변이 가능합니다. 예수님도 맹물과 공기만 마시고 살지 않으셨고, 아름다운 성전, 제대 장식물, 제병과 포도주도 다 돈이 있어야 구입할 수 있으며, 신부님 수녀님도 신자들이 내는 헌금 없으면 어떻게 살 것이냐고 볼멘소리를 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돈이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모든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자건 비신자건 오늘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돈의 노예와 시녀로 자기 스스로를 자리매김하고 돈에 절하고 돈을 얻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는 데 아픔이 있습니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힘이 돈 앞에서는 사라지고 맥이 풀려 무릎을 꿇고 만다는데 고민이 있습니다.

 

돈은 이제 하느님을 밀어내고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말았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믿음의 기도로 돈을 청하는 것이 신앙인의 모순입니다. 하느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예배에서 거지에게 푼돈 던지듯 봉헌함으로써 하느님을 무시하고 능멸하는 반면 진정한 나의 인 돈은 자신의 품속에 꼭꼭 모셔두는 것이 우리들의 자화상이라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요?

 

돈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도구요 수단일 뿐입니다. 아무리 돈의 위력이 대단한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라 하더라도 잊지 말아야 할 전제입니다. 돈의 마성(魔性)이 나의 마음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이유입니다. 하느님과 돈의 양자택일의 기로에서 용기 있게 하느님을 선택할 수 있는 배짱이 필요합니다. 그 배짱이 바로 하느님을 제대로 믿고 있다는 믿음의 표징입니다.

 

가진 것의 전부인 렙톤 두 닢을 바친 과부의 봉헌이 칭송받는 이유입니다. 세상의 재물, 돈에 자신의 의지처를 두지 않고 온전히 하느님께 자신의 전 존재를 맡긴다는 의탁의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내게 별 중요하지 않은 정도의 돈은 하느님께도 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소중한 돈은 주님께는 몇 배로 소중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내 삶에서 차지하는 봉헌의 크기가 믿음의 크기를 결정할 가능성은 매우 높습니다. 그것은 라는 존재가 이 세상과 이 세상을 지배하는 돈에 의지하지 않고, 명백히 의 전존재를 하느님께 맡긴다는 의사표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통치에 나를 내어놓는 전인적 행위의 드러나는 징표가 봉헌에서 나타납니다.

 

하느님 대전에서 돈에 쩨쩨한 사람은 쩨쩨한 신앙에 머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과 동일시했던 가난한 이들 앞에서 주저하는 사람은 늘 주저하는 신앙에 머물다 말 것입니다. 아니 그보다는 돈이라는 우상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늘 돈에 허덕이는 인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결코 부자가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미 부자라면 결코 하느님을 알아 뵙지 못할 것입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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