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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말씀과 함께, 공동체와 더불어

사제의글

2015-11-20 01:05

연중 33주 금요일

1,891
김오석 라이문도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루가 19,45-46)

 

사람들은 대부분 역린(逆鱗)’을 갖고 있습니다. 역린이란 용의 턱 밑의 비늘을 건드리면 죽임을 당한다는 전설에서 나온 말입니다. 무시무시한 분노를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성전 장사치들의 좌판을 뒤집어엎고 그들을 성전 밖으로 내쫓으시는 예수님의 얼굴에 서려있는 거룩한 분노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전의 대사제는 봉헌에 필요한 제물을 판매할 수 있는 좌판을 상인들에게 허락하고 막대한 이권을 챙겼습니다. 순례자들에게 성전통화를 바꿔주면서 막대한 폭리를 취한 환금상들의 뒤를 봐주고 이득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행태에서 백성들이 고난의 삶을 살 수밖에 없게 하는 지배자들의 탐욕과 불의를 보았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할 아버지의 집인 성전이 잡상인들과 탐욕과 부패와 불의로 뒤범벅된 성전 지배 계급들에 의해 강도들의 소굴이 되어버린 현실에 분노했습니다.

 

강도들의 소굴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강도들이 드나들면 성전도 강도들의 소굴이 됩니다. 사기꾼들이 드나드는 곳은 사기꾼들의 소굴이 되고, 장사치들이 드나들면 성전도 시장바닥이 되고 맙니다. 대사제들과 사제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경건하고 열심하다는 유다인들이 하느님의 집인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매일 성전을 드나드는 우리의 마음의 상태가 과연 성전을 성전답게 이루는 조건이 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사실에 가깝게 추론해 보면 성전 정화 사건은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과 군중들의 봉기의 성격을 지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홀로 수많은 좌판상들과 환금상들을 쫓아낼 수 없을 뿐 아니라, 성전 경비대의 존재도 감안해야만 합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을 적대시하던 지배계층에게는 예수님은 확실하게 제거해야할 위험인물이라는 인식을 확고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국 이 사건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직접적인 기소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선동죄(루가 23,2)와 독성죄에 해당된다는 것입니다.(루가 22,70-71)

 

사랑하는 딸이 강도에게 겁탈을 당하는데 두 눈으로 보고서도 싸우지 않는다면 그는 진실로 딸을 사랑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집이 허가받은 강도들에게 짓밟히고 있는데도 분노하지 않는다면 진실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몸은 하느님의 성령이 살아계시는 성전이며 양심은 하느님의 말씀을 품고 있는 지성소입니다. 우리의 몸이 살아가는 세상은 하느님나라의 씨앗을 품고 있는 성전입니다. 양심을 속이고 우리의 몸이 향락과 이기에 빠져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예수님의 분노를 사 정화의 대상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정치 경제적 부정과 불의와 불평등으로 더렵혀진, 세상이라는 성전 앞에서 예수님의 거룩한 분노는 당연합니다. 그분의 제자로서 예수님의 가슴이요, 눈이요, 손과 발인 우리들의 세상을 향한 거룩한 분노는 멈출 수 없습니다.

 

나만 바라보고 신세타령에 골몰하고 있으면 세상은 제멋대로 흘러갈 것입니다. 각자의 말과 생각과 행동을 내적성찰하며 정화 작업을 멈추지 않되 동시에 더렵혀진 세상이 하느님의 성전으로, 하느님의 나라로 변모되도록 우리의 뜨거운 가슴과 거룩한 분노를 포기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불의를 보고도 분노하지 않으면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정의로운 분노는 하느님 나라를 위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분노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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