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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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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의글

2015-11-23 01:17

연중 34주 월요일

1,874
김오석 라이문도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가운데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가 21,3-4)

 

가난한 과부의 봉헌이 왜 예수님의 칭찬을 받는 것일까? 그 이유는 단순하다. 삶의 절대적 조건은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라는 신앙고백이 그 여인의 봉헌에서 드러나고 있어서다.

 

하느님, 저를 세상에 있게 하고, 숨 쉬며 살게 하고,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할 분이 오직 당신임을 믿습니다. 이 세상 어느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오직 당신께만 의탁하며 살겠습니다.”라는 신앙고백이 가난한 과부의 봉헌에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어떠한가? 그런 신앙을 살아가고 있는가?

 

사람은 살덩어리를 지닌 성사적 존재다. 살덩어리를 지녔기에 이에 걸 맞는 물질의 지속적 보충 없이는 생물학적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그래서 종일토록 땀 흘리고 노동하며, 때론 서러움과 모멸감, 녹록하지 않은 밥벌이의 지겨움에도 불구하고 분투노력하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에너지를 소진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 재물()이고, 또 우리는 그 재물로 새로운 생명에너지를 얻는 순환의 과정을 되풀이하는 것이 인생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다.

 

그래서 좀 과장한다면 재물은 생명이다. 우리의 생명을 내놓아야 얻을 수 있는 것이 재물이기 때문이다. 신앙은 우리의 생명인 재물을 다시 우리의 생명만을 위해 써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우리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우선 소중한 나의 생명인 재물을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봉헌이다. 그러므로 봉헌은 나의 전 존재를 하느님께 드리는 거룩하고 장엄한 감사의 예배다.

 

우리의 봉헌 자세를 잠시 돌아보면 이런 통찰과는 거리가 있다. 준비 없이 미적미적, 그것도 길거리 노숙자에게 적선하듯, 내놓기 그리 어렵지 않은 액수를 마지못해 던져 넣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금액의 많고 적음을 막론하고 헌금하는 것은 내 살과 피, 내 생명, 내 삶을 다시 하느님께 되돌려 드리는 행위이고, 내가 봉헌한 나의 살과 피는 성체성사를 통해 예수님의 살과 피가 되어 나에게 다시 되돌아온다.

 

분명하게 가슴에 담아두어야 할 것은 재물은 다만 살아가는데 필요한 도구요 수단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재물의 마성(魔性)이 내 마음을 휘감지 못하도록 정신을 바짝 차려할 이유다. 하느님과 재물이라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 있을 때 용기 있게 하느님을 선택하는 배짱이 있다면 좋겠다. 그 배짱이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고 있다는 신앙의 징표이기 때문이다.

 

과부의 선택이 바로 그런 배짱을 드러낸다. 세상의 재물, 돈에 자신의 의지처를 두지 않고 온전히 하느님께 자신의 삶 전체를 맡긴다는 신뢰의 표징이기 때문이다. 내 삶에서 차지하는 봉헌의 크기가 믿음의 크기를 결정한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라는 존재가 이 세상과 이 세상을 지배하는 재물이 아니라 하느님께 의지한다는 표시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대전에서 재물에 쩨쩨한 사람은 쩨쩨한 신앙에 머물 것이고, 주저하는 사람은 주저하는 신앙에 머물 것이다.

가난한 과부처럼 우리도 예수님께 칭찬받는 봉헌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전적인 의탁의 마음 없이는 어림없는 일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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