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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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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의글

2016-02-10 02:12

재의 수요일

3,968
김오석 라이문도

자선을 베풀 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마태 6,3)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마태 6,6)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마태 6,17)

 


재의 수요일이다. 사순절이 시작되는 날이다. 부활을 준비하기 위한 40일간의 수행기간이다. 예수님의 생애 전체를 조망하고 묵상하며 내 삶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시기다. 좁게는 예수님의 체포 이후 모욕당하고 수난 받고 고통 받는 그 과정에 나도 함께 참여하고 그 고통을 느끼는 과정이 사순 시기다. 그러면서 나에게 임박한 죽음을 묵상하고 죽음이 삶의 완성이며 마지막 말이 아님을 깨닫는 시기다. 부활의 날개를 펴기 위한 전제가 바로 죽음임을 삶 가운데서 절절히 깨치고자 하는 과정이다. 매일 죽어 매일 새롭게 사는 부활의 삶을 살기 위한 수련의 시기가 바로 사순 시기다.

 


오늘 재의 수요일에 우리는 재를 머리에 얹는 예식을 한다. 실은 온몸에 재를 뒤집어 쓴 비참하고 못난 인간이 나 자신이라는 고백을 하는 예식이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세상과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아픈 자책이요 성찰을 재를 머리에 얹는 예식으로 대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를 머리에 얹는다는 것은 온 몸에 재를 뒤집어썼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만큼 내 자신이 비참한 존재라는 고백이다.

 


오늘 우리가 머리에 얹는 재는 작년의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우리가 손에 들고 흔들었던 승리와 영광을 외치던 환호의 나뭇가지다. 재로 변한 승리와 영광을 오늘 우리는 곱씹게 된다. 인간이란 존재 역시 숨 쉬고 살아있는 동안 삶을 구가하며 승리와 영광을 노래할지 모르나 결국 한 줌의 재로 사라질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는 뜻이다.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재를 머리에 얹을 때 들려오는 예수님의 음성이다.

 


오늘 복음은 자선과 기도와 단식의 의미를 가르친다. 자선이란 인생이 홀로 사는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자기가 소유한 것이 자기의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나만의 생각과 나를 위한 이기적 주장을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 앞에서 느끼는 연민의 감정보다 우위에 두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자선은 내가 하느님을 향하여, 빛을 향하여 걷기 시작했다는, 회개했다는 구체적인 표징이다. 자선은 내가 쓰고 남는 것을 쓰레기 버리듯 내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게도 소중한 것을 흔쾌히 기꺼이 나누는 것이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가슴 설레는 데이트다. 사순 시기는 하느님을 만나는 시기다. 나만의 광야로 물러나 그분과의 은밀한 만남을 기뻐하고 환호하는 시기다. 그분과의 만남에서 내가 누군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지금까지의 삶이 무엇이 문제인지 질문하고 답을 구하는 시기다. 기도하는 척 하지 말고 존재의 본질을 찾아야 하는 때다.

 


단식이란 나를 비우는 행위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나를 만드신 창조의 본 모습을 회복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부유하고 편안하고 배부름에 도취된 나의 자아를 깨우는 죽비가 바로 단식이다. 먹지 않음은 죽음을 각오한다는 뜻이다. 생명을 내어놓고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이 단식이다. 생명이 나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임을 깨닫는 것이 단식이다. 나의 배고픔으로 배고픈 다른 사람의 배를 불리고자 하는 사랑이 바로 단식이다. 허영과 욕심과 쾌락을 멀리하고 사랑의 사람이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가 바로 단식이다.

 


사순 시기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자신의 본 모습을 회복하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며 그 지표를 세우는 시기다. 위선과 거짓과 음모의 술수가 아니라 맑고 청아하고 진솔하고 정직한 마음과 얼굴로 그래서 하늘처럼 맑은 영혼으로 새로 태어나기를 갈망하며 수련하는 시기다. 그래서 사순 시기는 은총의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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