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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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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의글

2016-02-12 01:51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3,178
김오석 라이문도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5)

 


재의 수요일 하루는 단식하기로 마음먹었었다. 사순절을 시작하며 내 마음의 결기를 드러내고 싶었다. 설 명절 연휴라서 교구장 명의의 관면이 있었으나 나와는 별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종일 물만 마시며 지내다 밤 10시가 다되어 속 쓰림인지 배고픔인지 구별할 수 없는 허기에 견디지 못하고 누룽지를 끓여 먹었다. 물김치를 곁들여 맛나게 누룽지를 흡입하면서 육신을 입은 인간의 비애를 곱씹었다.

 


오늘날 가톨릭의 영성 생활에서 실제로 단식을 행하고 그 의미를 묵상하고 실천하는 일은 거의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 사목자들도 그리 강조하지 않는다. 기껏 1년 중 사순시기의 공식적인 단식도 두 번 하게 되는데 재의 수요일과 성 금요일이다. 그것도 한 끼는 먹지 않고 한 끼는 죽 정도로 가볍게 먹고 나머지 한 끼는 정상적인 식사를 하게 되어 있다. 재의 수요일이 설과 겹치는 경우가 종종 있어 관면을 받고 나면 단식은 그 명맥을 유지하기도 쉽지 않다.

 


단식 여부가 아니라 어떤 의도로 단식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다이어트를 목적으로 하는 단식은 복음의 가르침이나 교회의 전통 혹은 영성 생활의 진보와 어떤 관련이 있을 리 없다.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 서로 뜻을 같이 하십시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비천한 이들과 어울리십시오.”(로마 12,15-16)라고 바오로 사도는 권한다.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 먹고 마시고 즐기며 기쁨을 나누는 것이 예의며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다. 구원이란 같은 처지가 되어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곳에서 피어나는 예쁜 꽃이다. 이제 막 혼인한 신랑과 함께 있으면서 술과 음식을 거절하며 극기 절제하는 것은 잔치판을 깨는 어리석은 짓일 뿐이다.

 


예수님의 단식은 바로 이것이다. 굶주린 이들, 죄인들과 함께 먹고 잔치를 벌이는 것이 단식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사랑이란 같은 처지가 되는 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는 말씀의 의미다. 나와 너를 구별하지 않고 한 몸의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 진정한 단식의 속뜻이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6-7)

 


단순히 굶는 것은 단식이 아니다. 나를 정화하고 욕심을 절제하여 이웃과 나눔으로써 하느님께 한 발 더 다가가길 갈망하는 기도다. 특별히 신랑을 빼앗긴 날, 다시 말해서 내 마음에서 주님이 느껴지지 않을 때, 그때는 온몸으로 단식에 돌입해야 한다.

 


인간은 영과 육의 합일체이다. 온전히 영적이기만 한 종교는 없다. 영혼이 하느님을 갈망할 때 결국 육체적 행위와 태도로 결실을 맺는 법이다. 단식은 생명의 포기가 아니라 생명의 봉헌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감사하며 사랑의 실천에 돌입하겠다는 구체적인 외적 표지다.

 


나의 단식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담고 있는가? 내 마음 안에 하느님이 살아 계시는가? 나는 단식할 필요가 있는가? 없는가? 질문하고 묵상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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