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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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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의글

2016-02-17 00:45

사순 1주 수요일

4,645
김오석 라이문도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가 11,29)

 


예수님은 몰려든 군중들이 요구한 표징을 거절하신다. 표징이란 기적이다. 그들이 원하는 표징이란 현실적인 축복이다. 탐욕과 이기심, 지배욕을 채우기 위한 현실적인 축복은 예수님께 거절의 대상이다.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표징이란 요나의 표징밖에 없다.

 


요나의 표징이란 하느님의 명을 어기고 도망치던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고통 받고 사흘 만에 살아나서 이민족인 니네베 사람들에게 회개를 선포했고, 그들이 자루 옷을 걸치고 잿더미 위에 앉아 회개함으로써 재앙을 면한 것이다. 니네베 사람들은 착각과 오류를 인정했다. 자신들의 삶의 방식이나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지적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비수가 되어 심장을 찔러오는 불편한 말을 새롭게 다시 태어남의 기회로 받아들여서 기적을 일구어냈다.

 


입교 동기를 묻는 질문에 대부분의 예비자들은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는 항목에 동그라미를 그린다.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있는 기존의 신자들도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조금 찬찬히 살펴보면 그들이 원하는 마음의 평화란 매우 감성적이다. 주일 강론도 맘 편한 내용을 원한다. 세속에 시달리고 피곤한 몸으로 미사에 참석했는데, 성당에서조차 날카로운 자기비판이나 정치 비판, 사회 불의 비판 등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강론은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시시비비를 가려 올바른 선택과 판단을 하기 보다는 자기의 이익과 손해의 관점에 모든 판단을 고정시켜 버린다.

 


그리하여 신앙을 영적인 차원으로 한정하고 그저 현세적 축복과 마음의 위안을 빌어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고통을 잊으려 코미디를 보며 깔깔거린다고 평화가 주어지는가? 일시적 진통제는 될 수 있어도 치료제는 될 수 없다. 신앙이 주는 마음의 평화란 지독히 실존적인 차원의 것이다. 답답하고 헤어나기 힘든 늪과 같은 현실에서 참된 자아를 찾고 삶의 충만한 의미를 누릴 때 얻을 수 있는 실재다.

 


예수님은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악한 세대라 일갈하신다. 그러면서 당신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요나의 표징, 즉 십자가에 매달려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하는 당신의 표징 밖에 없다고 하신다. 십자가의 표징을 보고 자루 옷을 입고 잿더미 위에 앉아 삶을 새롭게 정초해야 한다는 것이다. 회개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요나서의 핵심은 이것이다. 이방인 니네베 사람들은 열린 귀로 요나의 선포를 아프게 받아들이고 마음을 돌이켜 구원받았다. 그런데 너 이스라엘은 어찌된 일이냐는 질문이다.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원하는가? 마음을 찢고 골수를 가르며 심장을 향해 날아드는 날카로운 비수의 침투를 허락하여 나를 해체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현실적인 축복이나 귀에 거슬리지 않는 말랑말랑한 말씀에 혹하지 말고 열린 귀를 청해야 한다. 나의 정서와 가치와 주장에 집착하지 않고 하느님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자기 깨뜨림이 요청된다. 깨뜨림은 깨달음이다. 예수님도 거절했던 현실적 축복과 거짓 마음의 평화에 매달리지 말 일이다. 마음의 참 평화와 행복은 예언자의 말을 듣고 돌아섬에서 오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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