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엽동성당

말씀과 함께, 공동체와 더불어

이야기마당

2020-03-08 19:20

사순 제2주일 청년 사순특강 (1/2)

1,291
오정석 라이문도

+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


한 주 동안 건강하게 아무 탈 없이 지내셨는지요?


이번 주 사순 특강 업로드가 조금 늦었습니다.


욕심이 많아져서인지 양도 좀 늘고 쓸데 없는 말들도 많이 한 것 같아


글을 다듬느라 시간이 평소보다 더 걸렸습니다.


그리고 양이 많아서 그런지(...) 글이 한 번에 올라가질 않네요.


불편하시겠지만 두 부분으로 글을 나누어 올립니다.


제목 뒤에 "(1/2)", "(2/2)"라고 쓰인 글은 하나의 글이니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아무쪼록 이 위기가 하루빨리 지나가길 기도합니다!





202038일 사순 제2주일

 

<강론 겸 사순시기 맞이 강의>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하고 명령하셨다.” (마태 17,9)

 

사순절이라는 이름에서

가장 쉽게 드러나는 의미는 ‘40’이라는 숫자입니다.

‘40’이라는 숫자는 성경에서 상징적인 숫자로 나타납니다.

구약에서는 노아의 홍수기간, 모세가 계명을 받기 전 단식기간,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뒤 광야에서 헤맸던 햇수,

호렙 산에서 엘리야가 기도했던 기간 등이

40이라는 숫자와 연결되고,

신약에서는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광야에서 단식하셨던 기간과 연결됩니다.

‘40’과 관련한 사건들의 공통점을 꼽을 수 있다면,

영광과 생명의 때에 앞서

절제와 고난을 통해

몸과 마음을 갈고 닦는 기간이었다고 요약해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 시국은

역설적이게도 사순 시기와 참 어울리는 시간인 듯합니다.

모두들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의 건강도 잘 챙기고 사시는지요?

참으로 고된 시간입니다만, 이 모든 일들이

우리의 영신 건강을 위한 수행 기간이라 여기고 함께 잘 버텨봤으면 좋겠습니다.

 

사순절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볼까 합니다.

사순절 동안에는 연중 시기와는 사뭇 다른 전례가 진행됩니다.

사제의 제의와 영대는 보랏빛(자색)으로 바뀌고

주일 미사 때에 바치는 대영광송과 알렐루야가 생략됩니다.

일반적으로 전례 안에서 자색은 통회와 보속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자색은 대림 시기와 사순 시기에 등장하지요.

두 시기의 공통점은 모두 앞서 언급한대로

영광의 때인 성탄과 부활에 앞서

모든 하느님 백성들이 재계(齋戒)를 통해

더욱 거룩한 몸과 마음가짐을 갖도록 촉구한다는 점입니다.

이 시기 동안은 다소 엄숙하고 무거운 분위기에서 전례가 진행됩니다.

알렐루야와 대영광송의 생략도 이런 차원에서 이해해볼 수 있겠습니다.

알렐루야는 야훼이신 하느님을 찬미하라는 뜻으로,

복음 선포 전에 복음을 통해 드러나게 될

하느님의 업적을 찬미하기 위해 노래되고,

대영광송은 삼위일체 하느님만이 거룩하시고 높으신 분이라는

신앙고백과 찬양이 담긴 서정시입니다.

사순 시기 때 이러한 찬미가 유보되는 까닭은

어느 때보다 더욱 큰 찬미가 필요한 사건이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 사순 시기는 보다 큰 영광을 위해

하느님께서도 백성들의 찬양과 찬미를 절제하시는기간입니다.

교우분들께서도 우리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도 우리와 함께 절제를 실천하신다는 뜻으로

사순 시기를 받아들이신다면

좀 더 기쁘고 위로로 가득 찬 사순 시기를 보내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절제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은 오늘 복음에서도 등장합니다.

(복음에서 명확하게 지시되지는 않지만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타보르산이라는 곳에서

그 유명한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때에 예수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이 빛처럼 하얘졌다고 복음사가는 증언합니다.

그리고 양 옆에는 모세엘리야 예언자가 나타나

그분과 대화를 나누었다고 묘사하고 있죠.

그러나 이 거룩한 예수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금방 사라지고 맙니다.

베드로 사도는 참 안타까웠겠군요.

평생 그곳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너무나 큰 영광을 보았는데,

그것이 찰나의 기쁨으로 지나가버렸으니 말입니다.

 

복음에서 드러난 사실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겠습니다.

일단 예수님의 얼굴과 의복이 눈부시게 빛났다는 뜻은

누구나 유추할 수 있듯이,

예수님의 위대한 신성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다.

그분의 본성이 인간일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초월하시는 하느님으로서의 본성 또한 갖고 계시다는 증거이지요.

탈출기에서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께 계약판을 받고 내려왔을 때,

얼굴의 살갗이 빛났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때 백성들은 모세에게 가까이 다가가기를 두려워했다고 합니다(탈출 34,29-30).

빛나는 얼굴은 하느님 혹은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로 묘사되곤 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본 사람은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두 제자들이

예수님의 얼굴과 옷에서 발산된 찬란한 광채를 보고 황홀해했음에도

하늘에서의 음성을 들은 후 땅바닥에 납작이 엎드렸던 것도

이러한 생각에서 멀지 않았을 겁니다.

하느님의 음성이 매개가 되어,

예수님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또한 발견했던 까닭이지요.

 

또한 이 모습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육신을 몸소 보여주고 계신 동시에,

종말에 이르러 다시 나타나실 그리스도의 모습

또한 미리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도 특기할 만한 장면입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하셨던

이 말씀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장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이 변모는 곧,

이미 우리에게 다가온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는 동시에,

금방 사라져버렸다는 점에 있어서는

아직 충만하게 실현되지 않은 사건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이미왔지만 아직오지 않은 사건이지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혹시 하느님 나라가 정확히 어느 때 오리라고 계시를 받았다는 사람의 말은

무시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 나라의 완전한 실현은 오직 하느님만이 아시기 때문입니다).


다음 장면으로 가볼까요?

새하얗게 빛나는 예수님 양 편에 모세엘리야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정말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모세는 교우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히브리인들을 해방시키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위대한 영도자였고,

엘리야는 이스라엘 왕국의 통치자였던 아합의 폭정을 견제하고

도탄에 빠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기적을 베풀어

하느님의 위로를 전달한 가장 큰 예언자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야에 관해 특기할 만한 점이 하나 더 있는데요,

성경 전체 내용 중에

죽음을 맞이하지 않은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창세기에서 아담의 자손의 계보 중에 등장하는

에녹이라는 사람이고(창세 5,24),

나머지 한 사람은 엘리야입니다.

엘리야는 엘리사를 후계자로 세운 뒤,

회오리바람에 실려 하늘로 올라갔다고 성경은 전하고 있습니다(2열왕 2,11)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도자이며

하느님과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누었던 모세,

그리고 끝까지 하느님께 받은 사명을 완수하고

죽음을 맞이하지 않은 채 하느님께로 돌아간 엘리야

예수님께서 함께 대화를 나누고 계셨다는 이 장면은

아직까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미심쩍어 하던 제자들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을 겁니다.

가장 하느님과 가까이 살았던

이스라엘의 위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대화를 나누는 예수님의 모습은

바로 이 두 위인이 살았던 시대에 말을 건네고

사명을 부여한 하느님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겠죠.

그러니 제자들(베드로, 야고보, 요한)

그분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분이심을 직감했을 겁니다.

이러한 직감은 베드로의 황홀한 고백에서 확실하게 나타납니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마태 17,4)

베드로에게 있어 타보르산에서의 그 모습은

우리가 항상 바라는 천국의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강렬하게 다가온 황홀경은 금세 끝이 나고

제자들과 예수님은 일상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의 일상에서의 모습을 상상해볼까요?

새벽 일찍 일어나 외딴 곳에서 기도를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고,

근처 고을에 들어가 가난한 이들과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이들에게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고,

쉴 틈도 없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드는 마귀들린 사람들과 씨름하고,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제자들에게 하늘 나라의 신비에 대해 설명하시고,

큰 잔치가 벌어지면 사람들과 함께 회포를 풀고,

때가 되면 그 고을을 빠져나와

다른 곳으로 복음을 선포하시기 위해 이동하셨을 겁니다.

 

예수님의 일상은 오로지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행하시기 위한 일들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고,

옷매무새나 용모를 가꾸는데에는 거의 시간을 들이지 못하셨을 겁니다.

그분 곁에는 언제나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모든 시간과 온 몸을 바치셨습니다.

그러니 항상 꾀죄죄한 옷차림새와

온 몸 가득히 전해져 오는 듯한 피로한 기색이

그분 곁을 항상 감돌고 있었을 겁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겠지요.

매일매일 그분과 함께 하는 시간이 행복하고 즐거웠겠지만,

자비를 청하는 이들의 요구를 결코 뿌리치지 않으셨던 예수님 덕택에

한시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쪽잠을 청해야 했던 제자들의 일상은

그리 녹록치 않았으리라 생각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피로감으로 소진되어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 있던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에게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하나의 선물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자기들이 믿고 따랐던 이가

하느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임을 알았으니 말입니다.

(물론 베드로는 일전에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시라고 고백합니다(마태 16,16).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 예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베드로에게

바로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마태 16,23)고 꾸짖으시지요.

이 구절(16,23)은 베드로 자신이 고백한 말이

어떤 무게를 갖고 있는지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복감도 잠시

예수님의 모습은 광채를 잃어버린,

어찌보면 초라해보이기만 한 평범한 유다인의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세 제자들의 생각은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하늘에서 장엄하게 울려 퍼진 음성이 들려왔기 때문이죠.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 17,5)

이 음성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고 나서

들려온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마태 3,17).

하느님께서 인정하신 당신의 아드님으로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다시 당신의 길을 뚜벅뚜벅 나아가시게 됩니다.

제자들은 아쉬움을 뒤로 한 채,

형언할 수 없는 경외심으로 예수님을 모시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 모든 사실을 함구해야만 하는

답답함을 지니고 타보르 산에서 내려오게 됩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에서

우리가 숙고해야 할 점은 오늘 복음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마태 17,9)

영광의 때, 예수님의 부활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일어난

이 어마어마한 사건은 엠바고(embargo) 상태로 머물게 됩니다.

참으로 사순 시기에 걸맞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순 시기는 부활이 없으면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실천하고, 또 실천하려는 모든 절제들은

단지 마침내 돌아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준비하기 위한 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만큼 부활은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한 사건입니다.

제자들에게 있어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실 메시아임을 증거하는

유일한 단서이자 신앙의 목적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직접 보기 전까지는

그들의 신앙도 의심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모습을 보면서

자기 삶을 온전히 복음을 선포하는데 투신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가져다주는 은총은

바로 이런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나의 신앙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투신하는 삶.

세상 안에서의 근심, 걱정이나 죽음조차도

우리의 신앙을 거스를 수 없게 만드는 공리(公理)

오로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뿐입니다.

댓글목록

정계순 엘리사벳님의 댓글

정계순 엘리사벳 작성일

영육의 호홉이 정지된것 같은 혼탁한 요즘의 생활에 희망과 빛을 찾습니다.

김옥주 마리안나님의 댓글

김옥주 마리안나 작성일

폰트크기를 큼직큼직하게 하셔서 한곳에 다 담지를 못한듯 합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