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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말씀과 함께, 공동체와 더불어

사제의글

2015-08-28 01:10

연중 21주 금(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2,283
김오석 라이문도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열 처녀의 비유다. 다섯은 슬기로웠고 다섯은 어리석었다. 밤에 신랑을 마중 나가는데 슬기로운 다섯은 등과 기름을 준비했으나 어리석은 다섯은 등만 가지고 나갔다. 슬기로움은 앞을 내다보는 준비성이고 어리석음은 오직 눈앞의 일만 생각하는 근시안적 생각 없음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매일 오늘의 말씀을 쓰면서 허우적거릴 때가 많다. 또 강론을 썼다하더라도 과연 이것이 교우들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나 하는 자괴감을 느낄 때가 많다. 내 안에 담긴 것이 별로 없어서이다.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공부와 삶 그리고 깊은 묵상이 어우러져 단단한 마음에 작은 균열을 낼 수 있는 그런 나눔이 쉽지 않다. 글로 표현하지 않고 간단한 메모와 짧은 묵상으로 대충 강론해 왔던 지난 세월들이 말씀의 칼날을 무디게 하였다. 소득 없는 칼질만 계속하였지 무딘 칼날을 벼리는 일에는 소홀했음을 자책할 수밖에 없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믿음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믿음의 열매인 순수한 마음으로 행한 사랑의 선한 행실이 가득 담긴 마음의 그릇을 갖고 있는 이들이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게으름과 타인에 대한 무관심으로 살아온 사람들을 지칭한다. 지금 당장만 생각하고 앞날에 대비하지 않는 태도를 지닌 사람들이다. 사랑의 계명을 등한시하고 행동으로 보여주지 못한 사람들이다.

 

열심히 살았는데도 뭔가 부족함을 느끼고 열매를 맺기가 어렵게 느껴지는가? 그렇게 느껴질 때는 나의 칼날이 무디어져 있음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믿음의 칼날, 사랑의 칼날에 드문드문 이가 빠져 있음이다. 살아가는 일이란 칼질을 하는 시간보다 칼날을 예리하게 벼리는 시간이 훨씬 더 길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서둘러 앞서가다가 종종 일을 망치는 경우가 많은 것은 당연지사다.

 

준비하는 시간은 고통의 시간일 경우가 많다. 그러기에 준비하는 시간은 겸손을 배우는 시간이기도 하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일이라도 준비하는 사람은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면 결과는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다.

 

공생활 3년을 위해 30년을 준비한 예수님의 모범을 기억해야 한다. 준비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준비가 없으면 하고자 하는 일이 잘 될 리 없다. 하는 일이 잘 되지 않는다면 지금은 칼질을 할 때가 아니라 칼날을 갈아야 할 때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어쩌면 칼날을 가는 시간이 우리의 인생 전체가 될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인생에 있어서 너무 늦은 때는 결코 없다. 언제나 새롭게 출발하는 그 시점이 구원의 때이다.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우리의 준비 상태를 점검해봐야 한다. 불을 밝힐 등과 이 불을 꺼지지 않도록 충분한 기름을 함께 준비해야 한다.

오늘 나의 그릇에 채워 넣을 기름 한 방울을 얻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곰곰이 헤아려 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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