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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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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의글

2015-08-29 01:16

연중 21주 토(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2,282
김오석 라이문도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마르 6,25)

 

요한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정말 그랬을까? 라는 의문이 드는 소설 같은 이야기다.

 

오늘 복음의 내용은 이렇다. 헤로데가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혼인한 것에 대해 요한이 옳지 않다.”고 한 것에 헤로디아가 앙심을 품고 있었는데, 헤로데의 생일에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어 잔치를 흥겹게 하자 헤로데는 무슨 소원이든지 하나 들어주겠다고 장담한다. 소녀가 자기 어머니 헤로디아에게 무엇을 청할 것인지 묻자, 요한의 머리를 달라하라고 지시한다. 요한을 의인으로 생각한 헤로데는 마음이 괴로웠지만 이미 손님들 앞에서 맹세까지 한지라 이를 허락한다. 그리하여 요한은 머리가 잘려 쟁반 위에 놓인 신세가 되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사실 여부를 떠나 마르코가 이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헤아리는 것이 오늘 우리의 몫이다.

 

첫째,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당시의 최고 권력자 헤로데가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것이다. 요한을 예언자로 생각했던 헤로데는 주저하긴 했으나 결국 요한을 죽인다.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 양심의 소리를 눌러버리는 권력자의 비겁한 표상이다. 자기 약속에 얽매여 마음에 없는 행동도 서슴없이 해치운다.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한다는 태도다.

 

둘째, 헤로데 보다는 헤로디아의 역할이 더 컸다는 사실이다. 남자가 강한 것처럼 보이나 여자에게 휘둘리는 것이 현실이다. 악한 생각을 마음 밭에 심고서 그것을 온갖 음모와 협잡으로 실행하는 악인의 표상이다. 자기를 반대하는 자의 목소리는 결코 용납하지 않는 소통 불능의 태도다. 좁쌀 같은 인간이 더러운 권력에 맛을 들였을 때 어찌 행동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셋째, 헤로디아의 딸은 권력의 개()임을 보여준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권력에 종속되어 올바른 자기 판단 능력 없이 꼭두각시 놀음으로 의인을 사지에 내모는 도구가 되지는 말아야 한다.

 

넷째, 요한은 불의 앞에서 주저하지 않는 예언자였다. 상대가 절대 권력을 지녔다 하더라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예언자의 정신이다. 설혹 목숨을 내놓게 된다 하더라도 해야 할 말은 하는 것이 의인의 길이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자의 부정과 불의를 고발하는 일은 커다란 시련과 고통을 수반한다. 생명까지 내놓아야 한다. 못 본 척 외면하면 편할 터인데, 콕 집어 지적하여 분란을 일으킨다. 정의는 본디 시끄러운 법이다. 참된 평화는 정의의 혼돈이 뒤섞여 있음을 마음에 새겨둬야겠다. 정의와 평화는 불의와 부정의 골수에 균열을 일으키는 분란이다.

 

이미 결정된 사안이라 하더라도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바로잡을 수 있는 겸손과 용기를 청해야 하겠다.

누군가를 궁지에 빠뜨리기 위해 술수와 음모를 획책하는 일은 꿈도 꾸지 말자. 험담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침소봉대하고 죄의 어둠을 숨기는 가림막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

오늘날 복잡한 사회구조 안에 편입되어 있는 내가 지극히 자연스럽게 선택하고 행하는 일이 악에 동조하는 일은 아닌지 점검해야 한다. 조직의 이익을 위한 관행적 타협과 거래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권력의 개() 노릇을 할 수도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악의 평범성이야 말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가장 무서운 적이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예언직에 불림 받았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할 것은 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할 수 있는 용기를 하느님께 청해야 하겠다. 그리하여 온 세상이 하느님의 창조적 본성을 회복하는데 목숨을 내놓을 수 있다면 좋겠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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