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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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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의글

2015-09-01 05:01

연중 22주 화요일

2,077
김오석 라이문도

!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루가 4,34)

 

권위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 앞에서 터져 나온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의 비명이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란 하느님과 아무런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이다. 포도나무에서 잘려나간 말라버린 가지처럼 사는 사람이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입으로는 말하지만 하느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며, 하느님 아닌 것을 하느님인양 의지하며 매달려 있는 사람이다.

 

맑고 깨끗한 영혼은 하느님 앞에 나서는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그분과 나누는 대화는 달고 향기롭다. 거룩함이란 바로 하느님과 맺는 내밀하고 친밀한 일치를 통해 드러난다. 사랑이신 하느님의 마르지 않는 우물에 연결되어 있는 파이프라인을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늘 사랑의 열매를 맺는 사람이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을 우리는 죄라 한다.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연결된 파이프라인이 끊어졌음을 의미한다. 죄로 더럽혀진 영혼은 하느님의 대전에 나아가기를 죽도록 싫어한다. 오랜 세월 냉담한 교우를 다시 하느님께로 되돌리는 일이 쉽지 않은 이유이다.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이유다.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하느님과의 만남과 관계를 원치 않는다. 이리 저리 온갖 핑계와 변명으로 피하고 도망친다. 그리고 하느님 아닌 세상의 것에 중독되어 살아가면서 하느님 없이 행복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돈과 술, 그리고 편안함과 쾌락이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도록 자신을 허락하고 내맡기고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경우 새롭게 하느님의 거룩함을 만나 자신이 움켜쥐고 있던 것을 버려야 하는 선택 앞에서, ‘나를 죽일 셈이냐!’고 아우성치며 곧 멸망할 것처럼 몸부림칠 수밖에 없다. 당연한 일이다. 회심이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편하게 가던 길을 돌아서서 하느님께로 몸을 돌리는 것이 말처럼 간단하지 않다. 삶의 관성, 즉 습관과 타성이 몸에 배어있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는 권위 있는 나자렛 예수님의 가르침에 내 마음이 열려있는지 성찰해봐야 한다. 혹 세상 것에 물들어 하느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면서도, 습관적 타성적 신앙 의례가 자신을 하느님과 상관있는 삶으로 만들어 준다는 착각 속에 사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질문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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