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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말씀과 함께, 공동체와 더불어

사제의글

2015-09-02 02:20

연중 22주 수요일

2,036
김오석 라이문도

해질 무렵에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을 앓고 있는 이들을 있는 대로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주셨다.”(루가 4,40)

 

목마른 사람에게 구원이란 단지 물 한 잔이면 충분하듯,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 구원은 당연히 병 고침이다. 길게 줄을 지어 예수님께 다가서는, 질병으로 고초를 겪는 모든 사람의 간절한 염원이 눈에 보이듯 선하다. 예수님은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따스한 당신 손으로 어루만져주시며 낫게 하신다.

놀라움과 경탄, 기쁨과 환희의 눈물이 넘쳐나는 장면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예수님은 그런 분이시다. 믿음으로 당신 앞에 무릎 꿇는 사람들의 소망을 결코 외면하지 않는 분이시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간 삶의 위로와 축복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당연한 말씀이다. 그것만이 신앙의 모든 것이라 말한다면 그렇다. 그러나 불완전하고 부족한 존재인 인간 삶의 모든 고난과 아픔, 시련과 슬픔을 각자 알아서 해결하라는 요구는 당연한 것 같지만 가혹하다.

 

믿음의 감각은 한계에 봉착한 인간의 자기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나 홀로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하고 두꺼운 벽 앞에서 주님께 무릎을 꿇고 의탁하고 도움을 간청하고 은혜를 바라는 것을 어찌 값싼 신심이라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혹 그런 이가 있다면 자신은 완전한 존재인 척, 이미 모든 인생의 비밀을 간파했고 도통(道通)했음을 자랑하는 교만한 자에 불과하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따스한 손을 얹어 위로와 축복을 주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 애써 밖으로 나가 찾아 나서지 못한다면, 적어도 내게 다가오는 사람에게는 그리할 수 있어야 한다. 특별히 가난하고 의지 가지 없는 약한 이들에게는 더더욱 그리해야 한다. 그러나 제 코가 석자라고 자신의 처지와 조건을 핑계 삼아 한 번 두 번 그 기회를 뒤로 미루다보면 어느새 자신도 무관심의 세계 속에 물들고 만다.

나 자신 역시 무딘 감수성과 영적인 나태로 쉽게 미루고 변명하며 나도 모르는 사이 사랑 없고 희생 없는 무관심이라는 악마적 세계 속에서 안주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곤 한다.

 

오늘 복음에서 앓는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손을 얹어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가슴에 새긴다. 비록 육체적 질병을 치유하는 능력은 갖지 못했지만 다가오는 교우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며 그들이 갖는 삶의 두려움과 불안을 어루만져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으로 위로와 희망의 한 줄기 빛을 함께 누릴 수 있는 그런 사목자로 살아가고 싶다.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되고 감동이 되고 구원이 되는 그런 삶을 소망하며 오늘도 용감하게 무관심의 세계에서 사랑의 세계로 넘어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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