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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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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의글

2015-09-03 23:55

연중 22주 금요일

2,006
김오석 라이문도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루가 5,38-39)

 

새로운 변화를 체질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들은 지금 현재가 좋다!’고 한다. 정치적 경제적 기득권을 움켜쥐고 있는 제도 권력자들의 생리다. 자기들의 손에 쥐어진 법과 권력, 재물이 무시당하거나 도전받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을 가리켜 보수주의자라 한다. 그 정도가 심하면 수구 꼴통이라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그러나 실상 보수, 보수적, 보수주의자라는 용어가 부정적 의미를 자체적으로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보수란 전통, 현 체제와 구조, 문화와 규범을 가치 있게 여기고 지키려는 관점이다. 기존의 검증된 신념체계나 바람직한 전통을 보존하고 계속 유지 발전시켜 나간다는 의미다.

문제는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의무(납세와 병역)를 회피하고, 공익보다는 사익을 탐하며, 위법과 탈법을 일삼으며 투기와 권력으로 치부하려 하고, 건강한 비판에 재갈을 물리려 종북과 좌빨로 딱지를 붙이고, 친일과 독재를 뻔뻔하게 미화하려 한다는 있다. 이런 이들은 보수라는 단어를 자신에게 적용시키면 안 된다. 보수는 합리적이고 정의롭고 품격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기득권자들을 스스로를 보수라 칭한다. 그들이 과연 보수의 품격을 갖추고 있는지 혹은 껍데기에 불과한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진리 혹은 교리(Dogma)에 대한 부동의 신념을 지키고자 하는 측면에서 교회와 교도권은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세상의 변화를 따라가는데 어둡고 더딘 측면이 강하다. 현대의 요동치는 과학과 기술의 발전, 가치관의 변화, 사회변동의 혼돈 속에서 제자리걸음 하는듯한 교회와 교도권을 바라보며 교회 안의 상당수 진보적 활동가들은 실망하고 좌절을 겪고 돌아선다.

복음의 가치에 입각한 새로움을 발견하고 쇄신하고 구체적 실천에로 나아가는 신앙의 연대성을 확보하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신자들의 과제다.

 

예수님은 당시 유다교의 경직성, 새 것에 대한 알러지적 거부반응이 어디에서 오는지 정확히 꿰뚫고 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새로움을 유다교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다시 말해서 유다교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은 시대의 이단아에 불과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당신이 추구하던 하느님 나라 운동은 유다교 종교지도자들의 보수성과 완고함 앞에서 날개가 꺾일 수밖에 없었고, 결국 이를 돌파하려는 예수님의 행동은 그들 앞에서 탈법성(정결례법 위반, 안식일 법 위반, 신성모독)으로 드러나게 된다. 예수님의 탈법성은 하느님나라를 지향하는데 있어서 비록 법과 제도, 관습에 어긋난다 해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탈법성이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에로 끌고 간 근본 이유다.

 

묵은 것이 편하고 안정적이고 좋을 수 있다. 당연하다. 그러나 변화가 없으면 살아있음의 본성을 상실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의 생각, 나의 신념, 나의 주장이 늘 옳은 것이라고 고집하고 집착하고 거기에 안주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새로움에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한다. 새로운 것이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불안과 두려움을 야기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참된 진리, 복음의 가치에 부합한다면 아프지만 기존의 나를 수정하고 교정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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