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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말씀과 함께, 공동체와 더불어

사제의글

2015-09-09 01:45

연중 23주 수요일

2,112
김오석 라이문도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6,20)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6,24)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6,21)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6,25)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6,21)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6,25)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 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6,22)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 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6,26)”(루가 6,20-26)

 

마태오의 산상설교와 대비되는 루가의 평지설교를 행복과 불행이라는 각각의 대구(對句)별로 재배열해 보았다. 그저 있는 그대로 한 줄 한 줄 마음에 새기며 묵상해 보길 권한다.

 

그런데 정말 이 말씀을 듣고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고 있는 사람이 행복할까? 예수님 때문에 미움 받고 왕따 당하고 모욕당하고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이 행복할까?

산해진미 실컷 먹고 배 두드리며 흡족한 미소를 짓는 부자가 불행하다고 생각할까? 모든 사람들에게 찬사 받고 존경받는 사람이 불행하다고 느낄까? 그렇지 않다. 현실에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세상에서의 결핍으로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가난한 이들 안에 담긴 희망을 말하고자 함이다. 희망이 있는 자, 가난해도 가난하지 않다. 세상 것에 대한 풍요가 주는 만족으로 이 세상에 안주하는 부자는 소경에 불과하다. 현실에 주저앉아 이대로를 외치는 자, 부유해도 부자가 아니다. 한치 앞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근본적으로 세상의 가치를 뒤엎는다.

비를 흠뻑 맞은 사람은 더 이상 비 맞는 것을 피할 이유도 없고 두렵지도 않다. 두려움을 마주할 때 두려움은 사라진다. 불행한 사람이 더 불행한 사람에게 몸을 돌릴 때 불행은 불행이 아니라 은총으로 다가온다. 행복은 바로 그 지점에 있다.

 

삶은 순간순간의 선택이고 행복도 불행도 다 그 순간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행복할 때 행복에 안주하거나 매달리지 말고, 불행할 때 불행에 좌절하고 도망가지 말고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하다. 가난이 곧 불행이 아니고 부유함이 곧 행복이 아니다. 행복과 불행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세상의 모든 조건과 상황은 바라보는 의 관점에 따라 그 가치가 뒤바뀐다.

 

모든 것을 상실하고 수렁에 내던져진 를 불행하다고 말한다면 가 그렇게 생각한 것일 뿐이다. 누구나 다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한다. 먼 길을 떠날 때도 첫 한 걸음부터, 위대한 조각품을 새길 때도 첫 번째 망치질이 정의 날 끝에 힘을 가할 때 떨어져 나오는 돌 한 조각에서부터 출발한다. 가장 밑바닥은 더 이상 내려갈 곳 없는 새로운 출발점이고 은총의 순간이다.

 

행복은 본래의 내 모습, 때 묻지 않은 어린이의 자연 상태를 회복할 때 주어지는 선물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긍정하는 마음이다. ‘본래의 나가 아닌 나의 소유로 착각하고 환상에 빠지는 순간 불행이 시작된다. 행복은 이미 내 안에 있는 것이어서 얻으려 애쓸수록 멀어져 간다. ‘나의 것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갖고 있지 않은 것에 마음을 쓰고 집착하는 순간 행복은 훨훨 날아간다. 부자는 가난한 이를 위한 나눔과 배려에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 ()는 영원하기 보다는 순간에 가깝기 때문이다. 가난한 이는 주저앉아 울지 말고 벌떡 일어나 우선 한 걸음만이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가난이 주저앉을 이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부자와 가난한 이가 서로 두 손을 맞잡을 수 있어야 한다.

오늘 예수님의 행복과 불행 선언의 의미를 곰곰이 되새겨 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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