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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말씀과 함께, 공동체와 더불어

사제의글

2015-09-11 00:26

연중 23주 금요일

2,113
김오석 라이문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루가6, 39)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루가 6,41)

 

진리를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으로서 교육은 위대한 일이다. 사람을 사람답게 이루어 내는 일이고 새롭게 변화된 사람을 홀로 서게 하는 본질적 힘이기 때문이다. 배움 없이 그 누구도 사람다움을 지닐 수 없다.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는 스승과 제자가 더불어 함께 하는 친밀한 시간과 관계가 필수적이다. 머리에서 머리로 전해지는 지식뿐만 아니라 마음에서 마음으로, 몸에서 몸으로 전해지는 전인격적 전수가 가르침과 배움의 참된 의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전인격을 넘겨주기를 원하신 참된 스승이셨다. 3년 동안 동고동락하며 함께 했던 시간은 예수님 당신 자신을 제자들에게 건네주는 도제 교육의 시간이었다. 하느님을 아는 지식과 올바른 예배, 그분을 아빠 아버지로 만나는 체험, 복음적 삶의 방식을 살고 선포하는 열정, 온갖 선행을 실행할 수 있는 준비, 진리를 올바로 드러내고 가르칠 수 있는 능력, 자신의 전존재를 하느님께 내어놓는 봉헌의 자세 등을 제자들이 갖기를 원하셨다. 제자들이 눈먼 이를 이끄는 눈먼 이가 되지 않도록 원하셨다. 무지의 어둠에 빠진 자가 똑같은 무지의 어둠에 있는 자를 진리의 빛 가운데로 인도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굴뚝 청소를 했다. 한 사람은 얼굴이 깨끗하고, 한 사람은 얼굴이 시커멓게 되었다. 누가 얼굴을 씻을까? 얼굴이 시커먼 사람일까? 그렇지 않다. 얼굴이 더러운 사람은 자신의 얼굴이 더러운지 거울을 보거나 누가 알려주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깨끗한 얼굴의 동료를 보고서는 자기도 깨끗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반대로 깨끗한 사람은 더러운 동료를 보고서 자신의 얼굴도 더럽다고 생각해 수돗가로 갈 것이다.

논리적으로 이 이야기는 올바른가? 아니다. 전제가 잘못되어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더러움을 바라보기 이전에 자신의 더러움을 먼저 살펴야 한다는 가르침을 얻기에는 충분하다.

 

매일 내 눈 속에 든 들보를 찾고 똑바로 바라보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괴롭고 고통스럽지만 그래야 배움을 멈추지 않고 수련에 게을러지지 않는다. 눈먼 인도자로 머물기 싫으면 꼭 해야 할 필수 요건이다.

나 자신 혹 눈먼 인도자는 아닌지 놀라게 된다. 천성적 다혈질의 기질을 아직 잘 추스르지 못해 욱하고 터트리는 못된 습성과 아직도 씨름하고 있고, 충분한 공부와 기도, 수련이 태부족할 뿐 아니라 복음적 투신에 주저주저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 마다 속상하다. 삶이 기초가 되지 않는 말이란 언제나 허황되고 감동이 없음을 잘 안다. 내가 말하는 만큼 삶이 따르기를 소망하며 오늘도 한 걸음 더 내딛는 순간을 살려 노력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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