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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말씀과 함께, 공동체와 더불어

사제의글

2015-11-16 01:03

연중 33주 월요일

2,092
김오석 라이문도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가 18,38)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던 예리코의 소경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고 하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자비를 청합니다.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조용히 잠자코 있으라고? “안돼요, 그렇게는 못해요, 예수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예리코의 소경은 이번 기회가 아니면 평생 눈 뜨지 못하고 암흑에 묻혀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직감했습니다. 그는 시력을 잃어 세상 만물을 볼 수 없었던 대신 자신의 내면을 더 많이 보았고, 더 깊이 성찰할 수 있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직관적 감수성은 하느님을 보다 쉽게 만나게 해주었고 세상 물정에 대한 예리한 판단이 가능했으며 이에 따른 실천력을 겸비하고 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자신을 알아야 자비를 청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시궁창에 머리를 박고 있음을 깨달아야 머리를 들어 푸른 하늘을 보게 되기를 소망할 수 있으며, 예수님 앞에 무릎 꿇고 자비를 청할 수 있습니다. 자비를 청하는 것이 새로운 출발이고, 매일 그런 출발이 반복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두 눈 멀쩡해서 잘 볼 수 있는 사람은 오히려 자주 오래 눈을 감고 세상과의 단절을 스스로 강제하고 자신을 들여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어떤 부류의 인간들과 사귐을 갖고 있는지, 말과 생각과 행동이 예수님과 닮았는지 아니면 정반대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미사를 시작하면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하고 기도합니다. 예리코의 소경이 외쳤던 바로 그 부르짖음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그 기도에 간절함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앵무새의 중얼거림이 대부분입니다. 나의 내면을 보려는 끈질긴 노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볼 줄 모르거나 외면하는 무지와 무관심 때문입니다. 나의 처지를 부끄러워 할 줄 모르고 세상의 아픔에 아파할 줄 모르는 감수성 상실이 소경이면서 소경 아닌 줄로 착각하게 합니다. 중요한 것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눈뜸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하느님을 만나는 첩경입니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슬픔 속에, 그리고 아파하는 마음에 축복이 숨겨져 있습니다. 문제는 슬퍼하지 않는 우리의 무감각입니다. 자신의 죄와 사랑 없음, 미성숙과 몰염치, 거룩한 분노의 상실을 슬퍼해야 합니다. 고통 받는 이들의 곁에 함께 하지 못하고 나의 일상에 매달려 살아감을 슬퍼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삶의 일상성에 익숙하여 감사함을 잃어버렸음을 슬퍼해야 합니다.

 

죄 없는 이들의 애꿎은 죽음에 담겨있는 내 탓을 슬퍼할 줄 알아야 합니다. 범죄와 불의로 고통 받는 이들의 아픔, 다양한 공해와 오염으로 인한 생명의 손상, 그리고 생태계 파괴와 여러 생물종의 멸종, 이상기후와 천재지변으로 인한 생명의 스러짐에 슬퍼하고 아파할 줄 알아야 합니다. 눈을 감고 그 상황에 처한 이들의 처지를 그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관상(觀想-상상으로 봄)입니다. 무엇보다도 꿈을 잃어버렸음을, 예수님이 나의 삶 속에서 낯선 분이 되어가고 있음을, 하느님을 내 삶의 모든 상황과 선택의 순간에 잊어버렸음을 슬퍼해야 합니다. 그럴 때 자비를 청하는 부르짖음은 간절해지고, 털썩 그 분 앞에 무릎 꿇게 될 것입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는 자신의 비참함에 대한 자각과 잃어버림에 대한 슬픔을 느낀 사람이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의지를 고백할 때 가능한 기도입니다. 자신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온갖 악에 대해 공동 책임을 느끼는 사람이 발하는 기도입니다. 부서지고 낮추어진 마음, 갈래갈래 찢어지고 터진 마음으로 울면서 부르짖는 기도이고 그 기도는 은총으로 변모합니다.

 

오늘 저는 슬픔과 아픔을 가슴에 품고, 예수님의 거룩한 분노를 마음의 촛불 삼아 저녁 7시 서울광장의 시국기도회에 갈 생각입니다. 밖으로 나가지 않고 안주했던 저 자신에게 내리치는 조그만 채찍질입니다. 엊그제 집회 도중 경찰의 물대포를 맞아 뒤로 넘어져 의식불명 상태로 사경을 헤매고 있는 69세 농부 백 남기(임마누엘, 전 가톨릭 농민회 부회장)형제의 쾌유를 빕니다.

 

이 땅의 지배 권력자들의 입에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진실된 부르짖음이 쏟아져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특히 대통령이 이 모든 상황을 슬픔으로 받아들이고 백성들 앞에 무릎 꿇고 자비를 청하는 신기루 같은 상상을 해봅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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