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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말씀과 함께, 공동체와 더불어

사제의글

2015-11-17 02:03

연중 33주 화요일

2,819
김오석 라이문도

자캐오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서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루가19,3-4)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부자였던 세관장 자캐오와 예수님의 운명적 만남의 이야기입니다.

땅딸보 난쟁이, 탐욕의 대명사,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모르는 양심에 털 난 사나이가 바로 자캐오였습니다. 풍족했으나 공허했고, 편안했으나 외로웠고 늘 다른 사람의 눈길이 두려웠던 가련하고 비참한 인생이었습니다.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고 공허한 마음은 물질로 채울 수 없습니다. 부자들이 모두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일입니다.

 

악인이란 자신의 악행이 나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양심이 돌덩이처럼 굳어버린 사람입니다. 선과 악에 대한 인식이 없어 동물적 본능에 의존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은 짐승 같은 놈이라 부릅니다. 부끄러움과 수치를 모르는 사람과 마주하는 것만큼 곤혹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그때는 다 그랬다고, 관행이었다고 뻔뻔스럽게 말하는 놈, 친일을 하고 사람을 억압하고 상처내고 죽였으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는 놈, 부동산 투기하려 위장전입해서 불로소득을 탐하고 떼돈을 벌고서는 그게 뭐 어때서라고 말하는 놈, 박사 학위 논문을 베껴 쓰고 제자들의 것에 버젓이 자기 이름을 걸고 관행이라고 태연히 말하는 지식 도둑놈들이 활개 치는 사회란 불의한 세상입니다.

 

그러나 앞뒤 재지 않고 확 뒤집어 버리고 싶은 그런 꽉 막힌 좌절과 절망의 상황일지라도 긴 호흡 한번하고 숨고르기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불의의 구조와 나쁜 놈들마저도 기다려주시는 하느님의 인내와 관용적 사랑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변화의 가능성을 가진 것이 인간이고, 아주 작은 틈만 보여도 주님께서는 당신 사랑의 화살을 쏘아 심장을 꿰뚫어 새로운 탄생을 이끌어 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자캐오가 바로 그런 틈새를 보여줍니다. 그저 예수님을 보고 싶다는 단순한 호기심이 어린 꼬마아이처럼 달음박질치게 했고 원숭이마냥 나무에 오르게 했습니다. 바위 틈새에 풀씨 하나 자리할만한 흙 모둠, 털 난 양심에서 털 하나 뽑혀지는 그런 단순한 호기심의 틈새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시고 여지없이 화살을 쏘십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자캐오는 나무에서 내려와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시고, 함께 먹고 마시고 머무르고 대화하고 내놓음으로써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됩니다.

 

안정되었고 여유롭고 편안한 삶이란 모두 경제와 정치권력에 자신이 종속내지 포섭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주류의 삶에 젖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유때문에 완전함(완덕)에로의 열망을 땅에 묻어버리면 그는 죽은 인생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죽은 목숨입니다. 익숙함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열망이 새로움을 선사합니다. 변화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변화는 하느님 앞에 합당한 존재로의 정향성을 지닐 때 의미가 있습니다. 그 때 아직 완성의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하더라도 분투노력하는 그 자체로 하느님 앞에서 살아있는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죽음이란 이미 이루어 놓은 것에 안주할 때 생기는 상태적속성입니다. 죽어있는 것은 늘 무엇인가에 종속되어있고 포박당한 상태입니다. 기존의 자신을 의문시하고 질문할 때 예수님을 만나는 길이 열립니다. 변화는 자신을 기존의 익숙함으로부터 이탈시키고 해체시키는 특징을 지닙니다. 이 과정은 낭만적이지 않고 늘 위험한 도전입니다. 자캐오의 달음박질과 나무에 오름이 바로 도전의 시작이었고 마침표는 전 재산을 내어주고 예수님의 사람이 되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예수님의 사람이 되길 갈망하는 우리가 오늘 버리고 떠나야 할 일상의 익숙함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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