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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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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의글

2015-12-02 22:24

대림 1주 목(선교의 수호자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대축일)

2,141
김오석 라이문도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

 

복음!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기로 작정했다면 그에게 복음은 생명보다 소중한 것이다. 예수님의 복음은 이렇다.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 회개하고 기쁜 소식을 믿어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부활이요 영원한 생명이다.’ 나에게 복음과 예수님의 가르침이 목숨만큼 귀한 진리가 아니요, 소중한 그 무엇이 아니라면 나는 결코 소중한 나의 것-나의 소유, 나의 생명-을 희생하거나 봉헌하지 못한다. 그것이 당연하다.

 

16세기 중반 인도와 일본에서 선교 사업을 위해 집을 떠나는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의 얼굴 표정을 상상 속에서 관상해 볼 필요가 있다. 그의 얼굴 표정이 보이는가? 그냥 상상해보라! 굳게 다문 입술, 푸른 눈과 구렛나루 수염, 오똑한 코 ... 그리고 그의 마음이 보이는가?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고 복음을 위해 이 한 생명 기꺼이 당신께 드리겠다는 굳은 결의가 가득하다. 이런 관상을 통해 나는 과연 복음을 어떻게 전하고 있는지, 과연 우리의 마음속에 담겨 있는 하느님을 믿는 믿음의 진짜 목적은 무엇인지 돌아봐야 한다. 선교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단 한 사람을 하느님의 자녀로 이끌어 들이는 것조차 무척 어렵다. 신앙생활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말한 기억이 없거나 그런 용기조차 없다면 나의 믿음은 아직 유치한 믿음이거나 죽은 믿음이다. 그조차 말로 하는 선교는 가장 아래 등급의 수준에 불과할 뿐이다. 보다 고차원적인 선교는 몸으로 행동으로 마음으로 보여주는 실천에 있다. 나는 과연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는가? 기억되기를 원하는가? 늘 질문함으로써 매일의 나의 마음과 행위를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 이것이 삶의 수련이다.

 

나의 몸과 마음이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으로 기억되게 하는 것이 진정한 선교요 복음 선포다. 그가 굳이 세례를 받고 성당에 나오지 않아도 상관없다. 단 한 사람에게라도 예수님의 모습 일부분이라도 나를 통해 보여줄 수 있다면 나는 이미 그 사람에게 또 다른 예수님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나는 이미 최고의 복음 선포자다.

 

구마의 능력이 없어도, 신령한 언어를 못해도, 독을 마시고 결코 말짱할 수 없어도, 치유의 은사가 없어도 복음을 사는 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신기한 능력을 추구하는 마음에 교만이 가득하다. 마술은 사람의 몸통을 자르고, 물체를 사라지게 하지만 그것으로 사람의 작은 생채기 하나 고칠 수 없다. 신기하지만 신비롭지는 않다. 신기한 것에 홀려 그것이 없음을 한탄할 필요는 없다. 삶이 신비다. 우리의 숨이 신비다. 하느님의 숨결이기 때문이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신비를 살며 그 신비를 전하는 것이 참된 복음 선포임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나의 삶보다, 나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이 예수님이 되도록 매일 매순간 애써 마음을 닦고 행위를 거룩하게 변화시키려는 노력과 더불어 기쁘게 이웃을 만나는 삶의 여정이 진정한 복음 선포의 삶임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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