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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말씀과 함께, 공동체와 더불어

사제의글

2015-12-06 23:24

대림 2주 월요일

1,945
김오석 라이문도

<그때에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군중 때문에 그를 안으로 들일 길이 없어 지붕으로 올라 가 기와를 벗겨 내고, 평상에 누인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 보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가 5,18-20)

 

세례를 받고 광야에서의 유혹을 이겨낸 예수님의 공생활은 회당에서의 선포를 시작으로 하느님나라의 전망을 드러낸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였다.”(루가 4,18)

 

더러운 영을 쫓아내고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어 전도여행을 떠나는 예수님을 향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환호하고 열광하는 모습이 오늘 복음의 장면이다. 사실 혜성처럼 나타난 예수님의 활약상을 보고 백성들을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나라가 눈에 보이는 듯 느꼈을 것이다. 선풍적인 인기로 예수님이 계신 곳은 인산인해를 이룬다. 감히 발 디딜 틈도 없었다.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보여주는 예수님의 치유 현장에 또 다른 하느님 나라가 드러난다. 몇몇 사람들이 중풍으로 쓰러진 친구 하나를 예수님께 보이려고 지붕에 구멍을 뚫어 내려 보낸 것이 그것이다. 이들의 우정과 집념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사랑하는 친구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요, 친구의 부자유는 나의 부자유였다. 벗이 건강하지 않음은 자신들의 건강도 무너진 것으로 받아들였다. 희망인 예수님께 아픈 친구를 만나게 하는 것은 그러므로 그들의 간절함이었고,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은 그 간절함의 열매였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치유와 더불어 죄의 용서를 선언하신다. ‘그들이라는 복수(複數)에 주목하면 그들은 참으로 아름답고 감동적인 공동체의 참모습을 보여준다. 예수님께서는 형제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나누고 해결하려는 의지를 지닌 그들의 우정과 사랑의 공동체를 보시고 넘치는 은혜를 베푸신다.

 

같은 시간과 같은 공간 속에서 우리는 가족, 친구, 이웃들과 더불어 살아간다. 한 신앙 안에서는 기꺼이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부르며 살아간다. 그러나 냉정하게 바라볼 때 내가 지금 당장 죽음을 당한다면 내 영전에 한달음에 달려와 진정으로 슬픔의 눈물을 뿌려줄 이 누구인가? 그런 형제자매는 몇이나 되는가? 죽음에 이르는 병이 들어 하루 이틀 쇠약해져 가는 나를 바라보며 진정 의지(依支)가 되어줄 이 몇인가? 삶이란 군중 속의 고독을 살아가는 것이라 했던가? 참으로 외롭고 고독한 것이 각 사람의 처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온 세상 사람들이 온통 자기만 바라보고 사는 이기(利己)의 욕망만이 넘치는 세상이라면 너끈히 그러할 것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좀 더 자기를 열고 살아야 한다. 좀 더 손해 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좀 더 너그럽고 관대해지는 것에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서로를 위해 선한 마음으로 진실 되게 잘되기를 빌어주는 기도에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더 친해지는 것을 내일로 미루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 나라에 걸 맞는 하나된 공동체의 삶을 일구는데 전심전력할 수 있어야 한다. 나의 죽음이 목전에 다가왔다고 생각하면 불가능할 것이 없다. 지금 여기서의 선택이 죽음의 순간 충만함의 여부를 결정한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은 이제죽을 때임을 기억하라. 우선 가까운 이들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가족들 사이에, 믿음의 형제들 사이에, 친구와 동료들 사이에, 이웃과 더 넓은 세상과의 사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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