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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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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의글

2015-12-07 23:51

대림 2주 화(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1,920
김오석 라이문도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

 

가브리엘 천사가 나자렛에 살고 있는 처녀 마리아를 찾아가 메시아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고 말한 것에 대한 마리아의 대답이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주인이고 저는 종이니, 저의 운명은 오로지 당신의 처분에 달렸습니다. 마음대로 하셔도 좋습니다. 저의 모든 것을 당신께 맡깁니다.’라는 전적인 의탁의 선언이다.

 

그러나 이 대답이 나오기까지 겪어야만 했을 마리아의 인간적인 고뇌와 투신의 결단을 우리가 외면해서는 곤란하다. 모른 체 해서는 안 된다. 성모님이 신앙인의 모델인 이유가 바로 이 대답에 있고, 이 대답의 과정에 내재된 고뇌와 투신의 결단에 있기 때문이다.

 

불임으로 인한 수치와 인생 말년의 적적함을 일거에 해소하는 임신은 축복이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보았을 때 마리아의 임신은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의 상황으로 내몰리는 위태로움이 그 안에 자리 잡고 있다. 혼사 날을 택하고 혼수 준비에 여념이 없을, 여인으로서 가장 들뜨고 행복한 시기에 벌어진, 뜬금없는 임신은 배우자로부터 파혼을 당할 것이고, 회당에 끌려가 돌팔매에 맞아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다. 가족들이 겪어야 할 수치와 모멸감 역시 제외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조상 다윗의 왕좌를 주시고 영원한 나라를 다스릴 아이가 태어날 것이라는 데에 어찌할 것인가? 고난 받는 민족의 해방과 자유를 얻는데 내 한 몸 바쳐 감당해 낼 수 있다면 어찌 그 길을 마다하리요. 하느님 말씀에 대한 신뢰와 순명 그리고 인간적 고난과 십자가의 두려움이 교차할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마리아는 결단하는 여인이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저를 내어 맡기오니 당신의 말씀을 성취하소서. 저는 그저 예! 하고 따르겠습니다.” 마리아의 고뇌와 결단은 수난 전야 올리브 산에서 고뇌하며 피땀 흘리던 예수님의 고뇌와 결단과 닮았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가 2242: 마태 26,39: 마르 14,36) 마리아의 선택과 결단 그리고 투신으로 하느님 구원 역사가 완성되었음을 생각할 때, 매일 매순간, 시간 안에서 행하는 우리의 선택과 결단이 결국 하느님 구원 역사를 이루게 된다는 놀라운 교훈을 배우게 된다. 신앙 고백은 그저 관념 속에서만 살아있는 유희가 아니다. 구체적 선택과 실천이 따르지 않는 신앙고백은 박제화된 장식품에 불과하다.

 

나의 성소는 과연 하느님께 !’라는 응답 속에서 봉헌된, 죽음도 불사하는 투신의 결단이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마리아 신심은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당신의 는 과연 어떤 인가?”

 

제 궤도를 벗어난 마리아 신심은 마리아의 고뇌로 되돌아와, 그분의 투신의 결단에서 새로 시작하는 것이 옳다. 이웃과 세상의 아름다운 변화를 위한 구체적인 투신의 결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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