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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말씀과 함께, 공동체와 더불어

사제의글

2015-12-10 01:37

대림 2주 목요일

2,615
김오석 라이문도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을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 “너희가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오기로 되어있는 엘리야다.”(마태 11.14)

 

세례자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이다. 성서가 말하는 예언자(預言者)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앞서 말하는 예언자(豫言者)와는 그 의미와 뉘앙스가 다르다. 성서의 예언(預言)맡길 예말씀 언이 합하여 말씀을 맡김이라는 의미다. 하느님께서 가장 신뢰할만한 사람에게 당신 자신과 당신의 말씀을 맡겨 그대로 말하게 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그대로 전하는 사람이 예언자다. 결국 성서의 예언은 미래보다는 현재에 더 집중한다.

 

예언자들의 역할은 이스라엘에게 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에게 죄란 하느님 없이 사는 삶이었다. 아무리 대단한 일도 자신을 위해서 한 것이라면 하느님 없이 행한 것이므로 가 될 수 있었다. 계명을 지킴으로써 겉으로는 경건한 삶이라고 착각할 수 있으나, 신앙 고백과 실천이 타성에 젖어 기계적이고 겉치레의 반복되는 일상이라면 하느님을 잊고 사는 것이며, 하느님 없이 살아가는 모습이며 예언자들은 바로 이런 이스라엘의 위선을 고발했다.

 

또 예언자들이 사회적 불의와 부조리, 불평등과 백성들의 고통을 지적하고 고발하는 것은 자연스런 결론이었다. 이스라엘의 부자와 기득권층이 진정으로 하느님을 믿고 섬겼다면 그런 고질적인 병폐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 예언자들의 논리였다. 가난한 이들의 배고픔을 외면하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노골적으로 짓밟고 무시하면서 하느님을 섬긴다고 말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모순이요 억지라는 판단이었다. 그런 식으로 서슬 퍼런 왕정의 절대 권력에 저항하던 수많은 예언자들은 천수를 누릴 수 없는 운명이었다.

 

세례자 요한은 그 예언자들의 전통 안에서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신 분이다. 구세주에 앞서서 그분의 길을 닦고 새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전령의 역할을 했으며, 뭇 예언자와 마찬가지로 권력의 미움을 받아 순교하였다. 헤로데 안티파스의 불의를 지적한 대가로 참수를 당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일컬어 여자의 몸에서 난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인물이라고 칭송한다. 아울러 요한이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라고 선언하신다.

 

엘리야 예언자가 종말 때에 먼저 와서 사자 역할을 한다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말라 3,23)에 따라, 예수님에 앞서 사자 역할을 한 요한이 바로 그 엘리야라고 하신 것이다. 요한은 또한 지극히 겸손하였다. 사람들이 그를 예언자 혹은 그리스도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을 때, 요한은 자신을 일컬어 나는 예언자 이사야의 말대로 주님의 길을 곧게 하라하며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요한 1,23)라고 대답하였다.

 

요한은 자신이 이 아니라 빛을 받아 반사하는 존재라며 겸허하게 자신을 낮추고 자신의 소명을 다 하였다. ‘를 내세우고, ‘나의 업적을 뽐내며 자랑하는 그리스도인은 빛도 소금도 될 수 없음이다. 세례자 요한처럼 비록 바람결에 흩어지는 메아리요 소리로 스러질지라도 불의와 싸우고 자신을 낮춰 스승 예수님의 말씀에 충실할 때 이 땅의 어둠을 밝히고, 세상을 살맛나게 하는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다. 녹아 없어지면 어떤가. 내가 녹음으로써 이전보다 세상이 조금 더 살맛난다면, 조금 더 예뻐진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자칫 생각에 얽매여 세상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나의 작은 행동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나라는 나의 작은 날개 짓이 태평양 바다를 건너 지구 반대편에 태풍을 일으킬 수도 있는 연쇄적인 반응의 열매임을 기억하면서 평신도 사도에게 부여된 예언직의 소중함을 묵상하는 오늘이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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