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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말씀과 함께, 공동체와 더불어

사제의글

2015-12-10 23:15

대림 2주 금요일

2,199
김오석 라이문도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 11,17)

 

흥겨운 음악과 노래가 울려 퍼지면 자연스레 어깨가 들썩이고 손장단 발장단을 맞추게 된다. 애석한 죽음 앞에서나 또는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고난과 고통 앞에 놓인 누군가의 곁에 서게 되면 아무런 관계가 없는 타인일 경우에도 저절로 마음이 울적해지고 슬픔의 눈물 한 방울 눈가를 적시는 것이 보통 사람의 자연스런 심성이다.

 

그러나 못된 놈, 얄미운 놈, 싫어하는 놈이 기쁨에 겨워 행복을 노래하는 풍악을 울리면 어깨가 들썩이기는커녕 양 미간을 찌푸리거나 삐쭉거리게 되며 못마땅한 법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 놈이 억울한 일, 고통스러운 일, 슬픈 일을 당하면 겉으로는 대놓고 드러내지 않더라도 웬지 고소하다는 느낌과 생각이 드는 것도 인지상정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가족과 이웃, 친구들과 형제들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가 공명(함께 울어줌)과 공감(함께 비를 맞음)의 중요한 기초가 된다. 긍정적으로 상대방에게 관심을 갖고 나의 것을 나누고 협력하려는 마음이 전제될 때는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마치 나의 일인 양 기쁘고 슬프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긍정성이 넘쳐 모방과 따름의 정을 품기 시작하면 공감의 정도를 넘어 동화의 단계로 진입하게 된다.

 

세례자 요한이 마음을 찢고 회개하라는 요구를 하자 유다인들은 결혼식 잔치처럼 기쁘게 놀자고 하고,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병의 치유와 마귀 추방으로 그 나라를 현실화하자 사람들은 거꾸로 예수님이 재를 뒤집어쓰고 곡을 해야 할 현실을 무시한다고 비난한다.

 

이 상황을 빗대어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이다. 세례자 요한을 금욕주의자로 비난하더니, 이제 예수님은 대식가요 술꾼이라고 비난한다. 예수님을 그만큼 미워하고 싫어한 유다인들의 부정적 인식이 물씬 드러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삐딱한 마음을 바로잡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번쩍 정신이 들도록 매서운 회초리가 필요하다.

 

매번 느끼는 아쉬움이지만 본당에서 준비한 특강에 교우들의 참여가 너무 저조하다. 맛있는 밥상을 차여놓았건만 입맛 투정하며 자신들의 게으름과 무관심을 맘껏 드러내는 듯하여 속상하다. 더 이상 배움이 필요 없다는 표현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평일 10시 미사 참여자 수보다 적은 신자들의 참여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내가 신자 분들에게 못된 놈, 얄미운 놈, 싫은 놈인가 보다. 그렇게 특강 참여를 강조하고 초대하건만 결과는 우이독경이니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인생은 끝없는 배움과 깨침의 과정이다. 그 누구도 이제 나는 충분하다고 자신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특히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더더욱 그렇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그렇고, 2천 년 전 이스라엘 땅의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고, 그 진리를 깨치고 실행함으로써 참된 행복의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에서 시간적 공간적 거리를 극복해야 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배움은 모방과 따름을 전제로 한다. 모방을 통해 바람직한 생각과 행동양식을 익히게 되고 구체적인 실천으로 따름을 완성한다. 모방과 따름이 이뤄질 때 창조와 앞섬이 가능하게 되어 주체적 자아를 형성하고 의미 있는 삶을 선사받게 될 것이다. 배움에 있어 너무 늦은 시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올해 마지막 남은 1217()의 특강에 알리미를 통해 저와 소통하는 모든 분들을 정중하게 초대하는 바이다. 결코 후회하지 않을 시간이 되리라 확신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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