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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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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의글

2015-12-12 02:54

대림 2주 토요일

2,086
김오석 라이문도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마태 17,12)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말라 3,23)

구약은 엘리야가 메시아의 선구자로 올 것이라 예언하였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이 당신에 앞서 온 엘리야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알아보지 못하고 권력을 향한 그의 질타와 저항을 빌미로 참수하여 버렸고, 이제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유다인들은 아직도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로 보지 않는다. 당연히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하지 않고 예언자 중 한분으로 해석한다. 유다교는 아직도 메시아는 오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왜 유다인들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진면목을 알아보지 못하였을까? 그것은 자기생각과 주장의 절대성에 매달려 세상과 사람을 편협하게 바라보기 때문이다. 힘 있는 메시아, 로마의 지배에서 해방되어 다윗 왕의 치세와 영화를 재건할 메시아를 기다리는 그들에게 가난한 이, 아픈 이, 소외된 죄인들과 어울리고 먹고 마시고 그들의 해방과 구원을 선포하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영웅이 영웅을 알아보는 법이다. 진리에 열린 마음을 간직한 사람이 진리를 알아보는 법이다. 열린 마음으로 들을 줄 아는 사람이 말하는 사람의 마음과 의도를 읽을 수 있는 법이다. 바쁘게 뛰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멈추어 선 사람이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느낄 수 있는 법이다. 엘리야를 기다리면서 요한을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메시아를 기다리면서도 예수님을 알아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세례자 요한도 고난을 받고 죽었으며, 사람의 아들인 예수님도 고난을 받고 죽었다.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의 사람을 알아보는 열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고난을 받는 사람의 얼굴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고난은 저항의 결과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불의한 권력과 사회악에 대한 저항,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 무시당하고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저항이 먼저이고 뒤이어 필연적으로 고난이 뒤따른다.

 


예수님의 신성은 저항과 고난으로부터 피어난 백만 송이 꽃이다. 예수님의 저항과 고난의 길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고난 받는 백성과 함께 하시는 출애굽의 하느님을 느낄 수 있었다. 가난하고 억압받는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야훼 하느님의 특징이 예수님에게서 확연히 드러난 것이다. 메시아의 선구자로서 세례자 요한도 바로 이 길을 걸었고 그 저항과 고난의 길에서 죽음으로 하느님의 신성을 드러냈기에 우리는 요한이 새로운 시대를 여는 메시아에 앞서 세상에 나타난 엘리야라고 본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임마누엘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의 신성은 오늘날에도 정복자의 폭력성이 아니라 역사의 희생자와 아픔을 함께 하는 편파성을 간직할 때 드러난다. 하느님이 누구신지 알고 싶다면, 그리고 내 안의 신성을 드러내고 싶다면 이웃의 아픔에 함께 해야 한다. 측은지심에서 출발하는 공명과 공감은 인간이 자신 안의 하느님을 드러내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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