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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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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의글

2015-12-15 00:39

대림 3주 화요일

1,878
김오석 라이문도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마태 21,31)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는 아버지의 지시에 맏아들은 싫어요!’하고 대답했으나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고, 다른 아들은 !’하고 대답했으나 일하러 가지 않았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는 질문이다. 당연히 맏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사실 맏아들의 처신은 올바른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 면전에서 아버지의 뜻을 거역함으로써 아버지를 화나게 하고 슬프게 한 불효를 저질렀다. 그러나 결국은 그가 칭찬을 받는다. 그것은 그가 바람직한 방향,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다른 아들은 아버지의 면전에서 잘 처신하여 아버지를 기쁘게 했지만 그의 말에는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잔재주를 피운 것이다. 순간의 면피를 위해 입에 발린 거짓 대답을 하였다. ‘하고 답했으나 부주의로 잊었거나, 게으름과 여러 핑계를 대며 아버지를 기만하고 배신하였다.

처음에 대답을 잘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말한 대로 실행하지 못한다면 그는 위선자요, 아버지의 뜻을 저버린 죄인이 되고, 아버지의 얼굴에 침을 뱉는 불효자식으로 판명난다.   

 

가장 바람직한 태도는 라고 대답하고, 대답한 대로 실천하는 것일 게다. 이것이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우리들의 태도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변화를 일궈나가려는 열린 자세이다. 자신의 부족함, 잘못, 죄악에 대해 아파할 줄 할고 변화를 추구하는 구체적인 행위가 더욱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것이 회개의 삶이다.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삶이다. 무너지고 으스러지고 상처 난 가슴을 부둥켜안고, 슬퍼하고 눈물 흘리며, 아버지의 뜻을 찾고 자신의 구체적인 행동을 바꾸는 사람이 진정한 아버지의 아들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고백신앙이다.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요 구세주임을 고백하는 신앙이다. 그러나 그 고백 안에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실천을 나의 것으로 하겠다는 서원이 담겨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대로 살아내는 삶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병든 신앙이요 가짜 신앙이다. 때문에 그리스도교 신앙은 철저한 실천신앙이다. 나의 마음과 행위가 예수님의 마음과 행위와 하나 되는 변화의 과정을 외면하거나 포기한다면 결국 남는 것은 자기위안에 불과한 기복신앙 뿐이다.   

 

실천이란 몸을 움직이는 구체적인 행동이다. 정태적인 명사의 의미가 아니라 동태적인 동사의 움직임이다. 따라서 신앙생활이란 몸을 움직이는 것이라 하겠다. 마음이 동의하고 지체 없이 발걸음을 떼고, 손을 사용하고 지혜를 짜내는 인간의 움직임이 믿음의 실체다. 하느님의 뜻은 편안함보다는 불편함에, 위로보다는 고난에, 폭식보다는 단식에, 소유보다는 내어줌에, 이익이 되는 일보다는 손해나는 일, 이기적 행동보다는 이타적 사랑에 더 가까이 자리한다    

 

오늘의 복음이 주는 교훈 한 가지를 기억했으면 좋겠다. 말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말은 마음의 외투이지만 외투보다는 내적 마음이 더 소중하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뜻에 맞는 합당한 실천이다. 잘못된 마음이 잘못된 말을 이끌어낼 수 있지만 곧 뉘우칠 수 있는 예리하게 벼린 양심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 늘 좋은 생각을 하고 그 좋은 생각을 말로 표현하고, 말로 표현된 것을 바른 실천으로 이끌어내는 끝없는 수련은 우리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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