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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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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의글

2015-12-16 00:01

대림 3주 수요일

1,768
김오석 라이문도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루가 7,23)

 


감옥에 갇힌 세례자 요한은 제자 두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 질문하게 한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신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루가 7,19; 22-23)

 


사람들은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본 것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는다. 자신의 귀로 직접 들은 것에 대해서도 신뢰를 형성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므로 경험적 방법에 의한 학습효과는 확고하고 오래 기억된다. 그러나 믿음이라는 말은 확실한 사실에 대해 쓰는 말이 아니다. 확실한 사실에 대한 설명이나 묘사는 다분히 서술적이다.

 


동물원에 가서 코끼리를 직접 본 아이가 코끼리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자신의 경험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엄마랑 같이 동물원에 가서 코끼리를 보았는데 덩치가 아주 큰 네발로 걷는 동물이었다. 특징은 코가 아주 길었다. 긴 코 옆으로 뿔이 두 개 있는데 그것을 우리는 상아라고 부른다.” 객관적이고 확정적인 언어로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는 것을 우리는 사실은 이렇다.’ 혹은 진실은 이렇다고 말한다.

 


믿음은 직접 보거나 듣거나 만져보지 않았지만, 믿을만한 매개자가 중간에 어떤 사실, 혹은 진실을 알려줄 때 그것을 내가 확신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는 믿음혹은 믿는다.’는 말을 사용한다. 그리스도교는 사도로부터 전해 받은믿음이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과 죽음과 특히 그분의 부활을 체험한 이들로부터 전해 받은믿음의 체계를 오늘 나도 공동체 안에서 받아들이고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내가 직접 체험한 것이 아니어서 안개 속을 걷는 것처럼 흐릿하지만 믿을만한 인도자의 손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면 밝은 세상을 보리라는 신념체계다

 


그러기에 믿음의 여정에서 의심은 필연적인 방해꾼으로 등장한다. 당연하게 거친 돌밭과 벼랑길이 계속되는 안개 속에서 이 길이 과연 바른 길인가?’하는 의심이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맹목이다. 따라서 합리적인 의심을 통해 믿음의 체계를 더욱 굳건히 하는가 하면, 적의가 동반된 반대를 위한 의심은 믿음의 체계를 망가뜨리고 좌절의 심연으로 추락시키는 훼방꾼이 된다.

 


하느님은 계시는가, 안 계시는가?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데 왜 이렇게 나를 고통 가운데 살게 하시는가? 무죄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겪는 고통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런 종류의 의심은 그 자체로 악이 아니고 오히려 선이라 할 수 있다. 합리적인 의심은 제대로 더 잘 믿기 위한 전제로서 제시될 수 있어야 하고 그 의심을 해소하기 위한 지적인 여정과 영적인 여정의 고삐를 놓지 않을 때 성숙한 믿음으로 진보한다. 이것이 믿음의 여정에서 의심이 갖는 순기능이다.

 


주님, 주님을 믿는 믿음에 균열이 가는 터무니없는 의심을 없애주시고, 더 깊은 믿음을 위한 합리적인 의심을 허락하시되 이를 풀어나가는 기도의 능력과 지혜의 빛과 진리를 향한 지치지 않는 인내심을 허락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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