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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말씀과 함께, 공동체와 더불어

사제의글

2015-12-31 00:09

성탄 팔일 축제 내 제7일

2,206
김오석 라이문도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한해의 마지막 날이다. 그 마지막 순간에 오늘 우리는 한 처음 천지가 생기기 전 하느님과 말씀이 함께 하심을 묵상한다. 온 우주와 세상과 사람들의 뿌리를 찾고 감사하는 시간이 한해의 마지막 날에 해야 할 우리들의 일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싶다. 세상을 향한 분에 넘치는 욕망으로 덧 씌워진 침침한 눈으로는 어림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과오는 매년 반복된다.

 


어둠은 결코 빛을 이길 수 없는 법이다. 하지만 왜 이리도 진한 어둠의 세력이 우리의 삶 전체를 뒤덮고 지배하는지 참 답답하고 속상하다. 사회적으로도 그렇고 우리 각자의 가정과 개인의 내면생활도 다르지 않다. ‘참 빛이 세상에 왔으나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요한 1,9-10 참조)는 복음의 말씀대로다. 애써 빛을 외면하고 두더지처럼 어둠 속으로 숨어드는 우리들의 음습한 내면을 이제는 열어젖혀야 할 때다.

 


하느님의 말씀은 생명이요 빛인데, 그 말씀은 우리 역사 안에서 가시적으로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살덩어리를 지닌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 안에서 계시의 절정을 이루었다. 그분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고 빛이 되어 주시는 분이라고 고백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므로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슬픔과 아픔, 좌절과 무기력을 떨쳐내고 어둠을 몰아내고 빛 가운데 새롭게 나를 정초해야 한다. 지난 한 해의 시간들에 엉겨 붙은 오점과 과오들을 반복하지 않으리라는 반성과 함께 주어진 조건에 최선을 다했던 순간들과 용서와 사랑, 헌신과 나눔의 아름다운 시간들이 허락되었음에 감사함으로 다시 출발해야 한다. 아쉬움과 후회도 많지만 기쁨과 미소의 조각들을 찾아내 마음 속 깊은 나만의 방에 간직하면 좋겠다.

 


어제와 똑 같은 시간의 흐름이요, 어제와 다르지 않은 낮과 밤의 하루지만, 인간은 시간을 매듭지음으로써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새로운 시간, 새로운 날을 이루게 된다. 자연의 원리이며 하느님의 선물이다.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새해가 뚜벅뚜벅 다가옴을 느끼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다. 묵은 것, 지나간 것에 대한 아쉬움 대신에 새로움에 대한 기대와 도전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예쁘고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순백의 도화지 한 장이 우리 눈앞에 있음이 심장을 쿵쾅거리게 한다.

 


언젠가 갈무리 해두었던 나무의 송년사를 나누고자 한다. 출처, 월간 <좋은 생각>

 


나무의 송년사

 


새싹들이 돋고 꽃이 필 때,

키가 자라고 잎이 커질 때,

그때는 모든 게 순탄하리라 믿었습니다.

따뜻한 햇살 아래 부드러운 바람맞으며 새소리 듣고 자라면

좋은 열매만 많이 맺을 줄 알았습니다.

 


어느 날 가뭄이 들어 목이 말랐습니다.

어느 날은 장마로 몸이 물에 잠겼습니다.

어느 날은 태풍이 불어와 가지를 부러뜨렸고

어느 날은 추위로 잎을 모두 떨구어야 했습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성한 잎,

온전한 열매 하나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나를 보며 슬퍼하지 마십시오.

 


나의 지난 한 해는 최선을 다했기에 충분히 아름다웠습니다.

다시 새해가 오면 나는 또 꽃을 피우고 잎을 펴고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상처와 아픔을 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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