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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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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의글

2016-01-01 23:30

1월 2일 토(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1,820
김오석 라이문도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6-27)

 


당신은 누구요? 그리스도요? 엘리야요? 우리가 기다리던 그 예언자요?’(요한 1,21 참조)그리스도를 찾고 있던 유다인들은 요한을 향해 다그치지만 그들의 눈을 가리워져 있었다. 그분은 멀리 계시지 않고 그들 가운데 서 계셨다. 요한은 대답한다. ‘너희가 모르는 분이 너희 가운데 계신다. 바로 그분이 너희가 찾는 분이다.’ 자기만의 아집과 편견, 욕심에 사로잡히면 바로 곁에 있는 분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한다. 보아도 볼 수 없고, 들어도 들을 수 없는 이유다.

 


메뚜기와 들 꿀을 양식 삼아 낙타 털옷에 맨발로 광야에서 살았던 세례자 요한은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고 그리며 살았기에 맑고 밝은 눈을 뜨고 있었다. 왜 그러지 않을까? 단 일주일 동안의 피정에도 사람이 훤해지고 후광을 발산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쉽게 볼 수 있다. 일상의 삶이 오직 하느님과의 대화, 만남, 그리고 자기 성찰과 수련에 맞닿아 있는 사람의 마음과 눈은 청정하여 멀리 보고 깊이 볼 수 있음은 당연지사다. 요한은 단박에 그분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아무나 그분을 알아볼 수는 없다. 스승이요 주님이신 분, 하늘을 마다하고 땅을 택하여 죄 많은 인간들과 함께 살기를 마다하지 않으시는 그분은 바로 우리 가운데 계시지만, 마음이 맑고 눈이 깨끗한 사람만이 그분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모르는 분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 가운데 와 계시지만 우리가 그분을 몰라본다면, 그것은 우리가 '모르는 사람'에게 몸을 굽혀 신발 끈을 풀어줄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모르는 사람'은 철저히 외면하는 배타적인 마음을 갖고 있는데 어찌 우리 가운데 계시는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을까? 아는 사람만 반기고 잘해주는 근시안을 접고 모르는 사람, 특히 기댈 곳 없는 힘없고 외로운 처지에 있는 이들, 지저분하고 예의 없고 때론 화를 돋우는 이들까지도 친절과 관대함으로 대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찌 모르는 분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까?

 


가난한 이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지 못하고, 마음이 무너진 이들을 감싸주지 못하고, 무고하게 잡혀간 이들을 자유롭게 풀어주지 못하고,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지 못한다면(이사 61,1) 여전히 우리는 그분을 뵙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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