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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말씀과 함께, 공동체와 더불어

사제의글

2016-01-07 23:57

주님 공현 후 금요일

2,163
김오석 라이문도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루가 5,12)

 


나병에 걸린 이를 우리는 문둥병자라 부른다. 지금이야 조기에 발견해 잘 치료하면 완치될 수 있는 의술이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에서 바라보기 역겹고, 마주칠까 두렵고, 혹 옷깃이라도 스칠까 걱정스러운 존재였다. 전염병이었기에 사회에서 격리되든 것이 당연했고 가족들과 생이별해야 했다.

 


이스라엘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나병에 걸린 이는 찢어진 옷을 입고, 머리를 풀어 헤친 차림으로, 진영 밖에 살면서, “부정한 사람이오, 부정한 사람이오.”하고 외쳐야 했다.(레위 13,45-46) 목숨이 붙어있지만 죽은 자의 노릇을 해야 했다. 자신이 느끼는 숨결을 부정하고 산다는 것, 스스로를 사람의 범주에서 제외시키며 살아가는 절망이 어디 또 있을까?

 


결코 나을 수 없는 병에 걸린 절망과 가족과 공동체로부터 격리된 사회적 죽음과 종교적으로도 하느님의 모상을 훼손한 죄로 내침을 당해야 하는 삼중고를 지고, 죽고 싶어도 죽어지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하는 운명이 문둥병자였다.

 


바늘 구멍만한 삶의 희망도 갖지 못한 채, 죽고 싶어도 죽어지지 않는 병으로 몸서리치던 이가 예수님 앞에 엎드린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루가 5,12) 연민과 자비의 예수님께서 그를 측은하게 보셨음은 명약관화이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깨끗하게 되어라.”(루가 5,13)고 말씀하신다. 문둥이에게 손을 내밀어 그를 만지는 것은 제도와 관습을 깨트리는 연민과 친교와 사랑의 행위이다. 격리시킨 문둥이를 나의 형제로 받아들이는 사회적 행위이다. 사제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치유의 확인을 받는 것(루가 5,14)은 하느님 대전에 나아가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게 하는 종교적 복권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전인적이고 총체적인 치유를 이루어 완전한 자유와 해방을 선사하시는 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유의 기적을 일궈낸 출발은 문둥이 자신이었다. 예수님 앞에 자신의 좌절과 절망, 더러움과 수치를 드러낼 용기와 실천을 통해 예수님의 연민과 사랑, 그리고 치유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다. 예수님 앞에 자신의 수치스러운 실존을 드러내고 새 출발을 청하는 자만이 하느님의 자비를 입는다.

 


겉보기에 멀쩡한 사지를 가졌지만 거짓과 위선의 썩은 심보로 온갖 악취를 뿜어대는 뻔뻔한 이들이 세상에는 차고 넘친다. 나는 어떤가? 병든 사람인가? 아니면 성한 사람인가? 육신의 문둥이보다 못한 더러운 모습으로 세상을 오염시키고 있으면서도, 예수님 앞에 엎드릴 생각 없는 무지한 영혼의 문둥이는 아닌지 오금이 저릴 뿐이다.

 


온갖 세속의 욕망과 거짓과 위선의 찌꺼기를 예수님 앞에 펼쳐 보이며 그분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주님께서는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울부짖을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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