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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말씀과 함께, 공동체와 더불어

사제의글

2015-03-22 17:11

사순 5주일

2,189
김오석 라이문도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고도로 발달한 과학과 기술은 사람들에게 전문지식을 요구합니다. 또한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이 선으로 인식되는 차가운 적자생존의 논리는 멈추어 서서 호흡을 가다듬게 하기보다는 끝없는 생존경쟁에로 우리를 몰아 부칩니다. 남들보다 뛰어나야 사람대접을 받는 사회 풍조 속에서 다른 사람을 위한 희생이 의미 있다는 말이 왠지 초라하게 느껴지는 세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당시 사회에서 지(知)를 찾는 사람들로 간주되던 그리스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에게 예수님을‘뵙게’해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성서에서 무엇인가를 본다는 것은 드러나는 외양만을 보는 것을 말하지 않고 그 외양 안에 담겨진 내면의 진실을 함께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몇몇 그리스사람들의 간청은 예수님의 실체가 진리 자체인지 확인하고 싶어 하는 염원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당신을 보고 싶어 하는 그리스인들이 있다는 제자들의 전언에 대해 예수님은 그들을 대면하기 보다는 당신 존재의 본질에 대해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의 요청에 답하십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따지고 궁리하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구체적 삶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밀알과 같은 삶을 사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서는 이 사실을 진리라고 믿는다면, 당신을 따라 오라고 그들을 초대하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 오너라”(요한 12,26)


예수님을 보는 것은 진리를 보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진리란 다름 아닌 밀알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으로써 더 크게, 더 풍성한 열매로 다시 살아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밀알의 삶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땅에 묻히는 숨 막힘과 껍질이 갈라지는 고통과, 자신의 몸 전체가 썩어가는 아픔을 거칠 때만 새로운 생명, 보다 크고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는 밀알의 평범한 진리가 우리의 삶에 그대로 적용되면, 삶이란 아픔이요, 고통이요, 그리고 그 아픔과 고통 위에 피어나는 작고 예쁜 꽃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당신이 말씀하신 밀알의 삶을 실천하신 구체적이며 최종적인 장소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에 대한 당신 사랑의 절정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죽음입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이며, 심지어는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도 끊어져 버린 절대 고독 상태에서의 죽음인 것입니다. 온전히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준 가난한 마음의 극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당신이 말씀하신‘밀알의 삶'이 구체적으로 실현된 최종적 완성인 것입니다. 온전히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낸 인류 구원의 완성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십자가를 말할 때, 십자가 그 자체의 의미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차체로 무척 중요합니다. 인류 구원이 그 십자가를 통해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 결국 십자가의 죽음에 다다른 예수님의 삶 전체, 십자가 사건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배고픈 이들의 밥이 되어 주셨고, 소외된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으며, 병자들의 치유자이셨으며, 부당한 권력자들의 마음을 가르는 예리한 칼이 되셨던 예수님의 삶 전체가 바로 십자가에 담겨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는 바로 그러한 예수님의 삶 전체가 집약된 종착역입니다.


우리는 지금 똑똑한 사람, 더 많이 가진 사람, 권력을 쥔 사람이 사람대접 받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불행히도 우리 역시 그런 사람들 중의 한사람이 되기를 갈망하는 것은 아닌지요? 가난함은 수치이며 불행이지 그것이 미덕이 된다거나 하느님을 더 잘 만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못 배운 것은 그 사람 사정이지 그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자연스런 사회 현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상식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이웃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고, 그래서 밀알처럼 많은 열매를 맺는 삶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자기의 것을 포기하는 것, 더군다나 자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기꺼이 내어놓는 일은 아픔과 고통이 필연적으로 뒤따릅니다. 십자가란 바로 그런 아픔과 고통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입니다.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밀알의 삶을 사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꺼이 자기의 가장 중요한 것을 내어놓는 삶은 아픔도 있지만 거기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자유가 있습니다. 체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인 우리들이 회개와 정화의 시간인 이 사순절에 십자가를 바라보며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십자가가 말해주는 밀알의 삶, 이웃을 위해 나 자신을 죽이는 작은 결단들을 계속함으로써, 경쟁의 논리와 이기적 생활방식이 활개를 치는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거쳐 부활하실 그리스도를 닮아 세상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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