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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말씀과 함께, 공동체와 더불어

사제의글

2015-03-27 22:56

사순 5주 토요일

2,236
김오석 라이문도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요한 11,50)

 

예수님을 내버려두면 로마가 유다 민족을 짓밟을 것이란 위협에 직면해 대사제 가야파가 내뱉은 말이다.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한다.’는 논리는 누구나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희생되어야 할 소(小)가 다수의 힘에 의해 구렁에 내 던져진다면 그것은 다수의 보신을 위한 폭력일 뿐이다. 명분은 언제나 나라와 민족이지만 내 던져진 이들은 늘 가난하고 힘없는 민초들뿐이다. 세월호에서도 우리는 이런 망령을 엿보게 된다. 경제(나라)를 위해 이제 세월호는 잊자고. 그만하면 되지 않았냐고. 내던져진 이들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멈추지 않는데 힘 있는 다수는 이제 잊자고 한다.

 

일치를 이루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힘 있는 다수가 힘없는 자를 죽임으로써 통합을 이루는 방식이다. 두 번째는 한 개인이 전체를 위해 스스로 죽음으로써 통합을 이루는 방식이다.

양자 모두 죽음이 전제되고 있으나 전자는 강제와 압제라는 폭력적 방식으로 힘없는 이를 죽음에 내몰아 제거함으로써 안전과 기득권을 지켜 가진 자들만의 일치를 추구한다.

후자는 온전한 자유로 전체를 위해 나의 생명을 내어놓는 것이다. 지금 나는 죽지만 오히려 죽음으로 네 안에 살아 시공을 뛰어 넘어 온전한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전자는 세상의 권력이 행하는 죄악의 모습이요, 후자는 예수님의 십자가로부터 수많은 순교자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교회 역사 안에서 살아 숨 쉬는 그리스도교적 가치관의 정수라 할 것이다.

 

하나가 모두요, 모두가 하나다. 하나를 잃으면 모두를 잃는 것이요, 모두는 튼실한 하나가 있기에 모두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한 사람 안에는 우주가 담겨 있다. 하느님의 숨결이 있다. 그러기에 사람을 소우주라 하지 않는가? 전체를 위해 하나를 희생할 수 있지만, 그 희생은 자발적인 것이요, 주체의 적극적인 선택에 의한 결단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살인의 폭력일 뿐이다.

 

우리 안의 양 백 마리가 있을 때는 백 마리가 전부이지만, 한 마리가 우리를 벗어났을 때 한 마리의 무게가 아흔 아홉 마리와 같다는 것이 예수님의 셈법이다.

 

내가 속해 있는 가정, 직장, 이웃, 본당의 단체와 여러 모임에서 다수의 무시와 힘에 의해 구석으로 내몰리고 있는 작은 자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우리의 논리와 가치관이 밀려난 한 마리 양에게 아흔 아홉 마리 양의 무게를 둘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오늘 혹시 내게 주어진 힘이 다른 사람의 희생을 강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했으면 한다.

아울러 꼭 필요할 때에 모두를 위해 기꺼이 나를 내어놓고 죽을 수 있는(?)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비움의 영성을 기도하고 실천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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