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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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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의글

2015-03-29 23:18

주님수난성지주일

2,266
김오석 라이문도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34)

 

오늘의 말씀은 예수살렘 입성 복음과 수난복음으로 구별된다.

기쁨과 환호, 기대와 희망, 승리와 영광의 예루살렘 입성 복음에 비해 수난 복음은 인간의 삶과 역사에 자리 잡고 있는 어둠과 슬픔, 비탄의 침묵, 어찌할 수 없는 존재의 어두운 현실을 묵상케 한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없어서는 안 될 봉사가 필요했으니 바로 나귀 주인의 적극적 협조였다. 나귀 주인의 협조가 필요하듯 주님께서는 날마다 우리의 봉사를 필요로 하신다. “주님께서 필요하셔서 그런답니다.”는 말씀은 매일 우리의 귓가를 맴도는 그분의 호소요 부르심이다. 성주간 동안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주님!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오늘의 수난 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하고 있다. 고난과 고통은 우리의 삶에 무엇인가? 왜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께 그리고 우리 인생에 고통을 허락하시는가?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35-36)라고 기도한 게쎄마니의 장면.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34)

 

예수님의 이 절규는 고통에 맞닥뜨린 모든 인생들의 외침을 대신한다. 언젠가 이와 똑같은 기도를 바쳤던 기억이 있거나, 아니면 언젠가 이와 똑같은 기도를 바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은 이 시대에도 우리의 삶에도 계속되고 있는 진행형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신앙 안에서 축복과 은총은 눈물과 슬픔과 결부되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는 사실에 눈뜰 수 있어야 하겠다. 우리 눈에 불행과 비극으로 보이는 지상의 현실들이 실상 하느님의 축복과 사랑에 연결되어 있다는 역설을 알아챈 사람들에게 복이 있나니.

그러므로 매번 지는 싸움만 하는 이 땅의 가난한 이, 보잘 것 없는 이, 작은이들의 정의로운 선택과 실천이 그래서 의미가 있고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통로가 된다.

 

다 잃었다고 여겼으나 하느님은 더 크게 채워 주신다. 고난의 껍데기만 갖고 볼 것이 아니라 고난 그 속에 감추어진 축복의 소중한 알맹이를 볼 줄 아는 영적 눈뜸을 청하자. 하느님의 사랑은 내게 지워진 십자가를 내던지고 골고타를 내려오면 사라지고 만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타의 정상에 올라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힐 때 그 사랑은 내 인생의 꽃으로 피어날 것이다.

 

사순절은 죽음을 통한 변화를 꿈꾸는 시간이다. 죽음을 담보로 성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참고 견디어 내 성공이라는 복, 선물을 얻기 위해 일시적으로 죽음을 고통을 예찬하는 그런 시기가 아니다.

 

오히려 사순 시기는 진지하고 담대하게 고통의 현재를, 사람이 죽어가는 비통한 상황을 직시하는 시간이다. 고통에 처절하게 아파할 줄 아는 사람만이 전적으로 하느님께 의탁할 수 있고, 전적인 의탁과 봉헌에서 우리는 백인대장처럼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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